등록 : 2009.11.05 21:41
수정 : 2009.11.0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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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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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를 둘러싼 정치권의 소용돌이가 거세다. 정당, 계파, 지역 간 갈등이 커지면서 언제라도 뇌관이 폭발할 기세다. 그 한가운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원안 고수 방침을 밝혀 세종시 수정론에 제동을 걸었다. 야당 대표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올 정도다.
그는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운 길이라고 돌아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게 박 전 대표의 힘이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샛길을 좋아한다. 특히 여러 사람들 틈에 끼어 경계선을 슬쩍 넘어가길 좋아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4일 세종시 수정론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약속을 뒤집은 데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서울시장 시절 반대에서 대선 후보 시절 찬성으로, 당선 이후 다시 수정으로 말을 두 번이나 바꿨지만 진지한 반성과 성찰은 한 번도 없었다. 원칙 없는 말바꾸기가 실용주의의 정신을 퇴색시켜 버린 셈이다. 어쩌면 이명박 정권이 끝난 뒤 실용주의라는 말을 상당 기간 사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반면 박 전 대표는 신뢰와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심지어 여론의 흐름까지 바꿔놓았다. 한때 수정론으로 기울던 여론이 그의 발언 이후 원안 유지 쪽으로 돌아섰다. 이 대통령의 약한 고리를 적시에 건드림으로써 자신의 주가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역사를 돌아보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여성 지도자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이다. 그는 자신의 원칙과 벗어날 경우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그 불도저 같은 힘으로 노동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보수당 장기집권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철의 여인은 내부에서 무너졌다. 타협하지 않는 대처 수상의 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집권층 내부에서 피로를 누적시켰고 소통을 막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이와 다른 스타일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처녀였고 전통과 원칙을 중시하는 군주였다는 점에서 박 전 대표와 닮은 점이 많다. 하지만 그는 원칙만 지키는 고지식한 여왕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는 기존의 형식과 관습을 과감하게 벗어던졌다.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백성의 생활과 안위였다. 거리를 행차할 때는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나 다가와 청원을 올릴 수 있었다. 청원을 끝까지 듣고 난 뒤엔 반드시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연설 때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 “나보다 위대한 군주는 있을지 몰라도 나만큼 백성들을 사랑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라고.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영국을 최강대국의 자리에 올려 놓은 여왕이었지만 그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관심사는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어떤 정치 지도자를 지향할 것인지는 박 전 대표가 스스로 선택할 일이다. 다만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이 대통령에 대한 견제심리에 안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한 발 더 다가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박 전 대표만이 아니다.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사례를 귀중한 참고자료로 삼을 만하다. 원대한 개혁을 꿈꿨지만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노무현 전 대통령, 50% 가까운 득표율로 집권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믿음을 상실한 이명박 대통령의 경험이 이미 말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지 못하는 집권자가 결코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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