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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31 19:39 수정 : 2009.12.31 19:39

김종구 논설위원

흘러가는 세월에 마디를 표시해 놓는다고 우리네 삶이 거기에 맞춰 구획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갑자기 어제와 다른 내일이 펼쳐지지도 않는다. 고달픈 삶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힘겹게 굴러갈 뿐이다.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궂은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리고 희망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리고 허파 가득히 신새벽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가슴속에 소망의 언어들을 담아 본다. 건강, 행복, 번영, 화합, 풍요, 인권, 자유, 평화…. 개인적 차원이든, 나라나 공동체적 관점에서든 미래를 기원하는 단어들은 많고도 많다. 모두 아름답고 소중한 어휘들이지만, 가장 마음이 끌리는 단어는 상식이란 두 글자다.

상식의 정확한 의미를 여기서 철학적 과학적으로 심오하게 따질 계제는 아니다. 상식이라는 말도 그저 상식적으로 넉넉히 생각했으면 한다.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거나 가져야 할 사리분별이나 판단력이라고 해도 좋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세상의 보편적 사고방식이라고 해도 좋다. 새해 첫날을 맞이하며 상식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의미는 자명하다. 새해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상식이 지켜지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에서다.

상식은 영어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공통의 감각’(common sense)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원활한 소통을 돕는 사회기반시설이 바로 상식이다. ‘끊임없는 논쟁을 잠재우는 예리한 무기요, 번거로움을 피해 갈 수 있는 이정표’다. 아무리 각자의 멋과 취향대로 사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이정표가 있기에 사람끼리 말도 통하고 합리적 논쟁도 가능하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우리 사회에는 그런 기본 골조가 허물어져 버렸다.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한 상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비상식인 경우가 비일비재해졌다.

세상을 살다 보면 사리에 합당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참고 넘어가야 할 경우를 다반사로 만난다. 그 대상은 권력의 횡포일 수도 있고, 가진 자들의 오만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임계점은 있다. 바로 최소한의 상식이다. 언론관련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그 이후 전개되는 양상을 예로 들어보자. 헌재의 판단이 언론관련법의 ‘유효’를 선언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한글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이다. “국회 통과 과정에서 발생한 절차적 위법성을 국회 스스로 시정하라는 뜻”이라는 헌재 고위 관계자의 친절한 설명까지 있었다. 이쯤 됐으면 국회가 어떤 후속 조처를 내놔야 할지는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상식의 배반이요 몰상식의 극치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에 대한 검찰 기소와 신태섭 동의대 교수 해임 조처의 결말도 마찬가지다. 한때 활개 치던 야만과 비상식이 법원의 무죄·무효 판결이라는 상식 앞에 박살이 났다면 가해자는 뭔가 머쓱한 표정이라도 짓는 게 도리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대통령 특보 출신을 공영방송 사장 자리에 떡 앉히는 몰염치 앞에 상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민심이나 여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건강한 상식의 총화다. 민의에 충실한 정치라는 것도 결국 건전한 상식에 기반해 나라를 이끄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곁에서 보기에는 그것처럼 쉬운 일도 없을 듯싶다. 그런데도 권력은 자꾸만 다른 쪽을 바라보니 당사자도 힘들고 백성들은 고달프다. 사실, 상식을 따르자는 말처럼 따분하고 진부한 이야기도 없다. 상식의 파괴가 변화의 원동력이라는 명제도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식, 그 평범함과 진부함이 너무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김종구 논설위원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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