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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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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대결을 정치적 위기의 돌파구로 활용해온 사례는 수없이 많다. 국면 전환의 고전적인 수법으로 여겨질 정도다. 9·11 테러를 이용해 입지 강화에 성공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정치적 위기는 아니었지만 테러 위험을 부풀려 전쟁으로 몰아감으로써 지지도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군사적 충돌로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봤다. 그는 작은 정부를 향한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이 난관에 부닥친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이란 호재를 만났다. 포클랜드 제도 영유권을 둘러싼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서 영국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고, 대처는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장기집권의 기반을 마련했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도 비슷하다. 트루먼은 애초 소련(러시아)과의 전면적인 대결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2차대전 종전 이후 냉전이 가시화하고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군사적인 대결로 방향을 틀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겠다는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이후에야 그는 정치적 입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내친김에 국가안보법을 통과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을 잇따라 창설했다. 국내에선 말할 것도 없다. 역대 대통령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을 정치적 탈출구로 이용했다. 수공 위험을 조작한 1986년 평화의 댐 사건과 1997년 대선 직전에 터진 북풍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천안함 사건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 악화로 고전중인 정부·여당에 더할 수 없이 좋은 기회다. 언제든지 제2의 북풍으로 몰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조계종 외압 파문, 종교계의 4대강 반대 등 여권의 악재들은 이미 천안함과 함께 수면 아래로 잠겨 버렸다. 그러나 정작 이명박 대통령의 태도가 이상하다. 어느 때보다 신중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 “예단하거나 추측해서는 안 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북한이 개입됐다고 볼 만한 증거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5일 라디오 연설에선 “원인 규명은 속도보다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아가 어느 날 갑자기 모범생으로 돌변했다고나 할까? ‘신뢰’라는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던 그의 이런 모습이 의외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보수적인 인사들로부터는 “북한을 변호한다”는 말까지 듣고 있다. 이것이 이명박식 실용주의인지, 남북 정상회담이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고려한 정치적 계산인지 알 길은 없다. 최근 여권의 이념공세가 여론의 역풍을 불러왔다는 것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혼란과 위기 국면에서 대통령이 냉철한 자세로 중심을 잡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일이다. 온갖 추측과 주장이 난무하지만 아직 어느 것 하나 유력한 설이 없다. 북한 관련설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단계에선 북한의 개입 가능성을 뚜렷한 근거 없이 예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능성을 성급하게 배제하는 것 역시 위험한 발상이다. 이 대통령이 선체 인양 이후 어떤 태도 변화를 보일지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그의 리더십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점이다. 그뿐 아니다. 나라의 운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그에겐 두가지 길이 놓여 있다. 한쪽은 이번 사건을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대통령으로서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이다. 어느 쪽을 취하든 선택은 이 대통령 자신의 몫이다.
정남기 논설위원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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