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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구 선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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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 중 하나인 무디스가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외환위기 이전으로 상향조정했다. 100년 만의 위기라던 국제 금융위기를 우리나라가 성공적으로 극복해가고 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천안함 침몰로 남북관계가 미묘한 시점에 이뤄진 것이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실제로 국내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는 징후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지난 3월 취업자 수가 2년여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한국은행도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5.2%로 상향조정했다. 비록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분배 상황이 악화하기는 했지만 거시경제 전반적으로 경기회복세가 빨라질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정부의 태도다. 국내외적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도 여전히 신중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아직 불안요인이 남아 있어 이른바 ‘출구전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아니라는 점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금리 인상 같은 출구전략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말라는 투다. 김중수 신임 한은 총재도 엊그제 국회에 출석해 세계경제의 더블딥(이중침체)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금리 인상은 민간의 자생력 회복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이런 태도는 외환위기 때와 비교할 때 평가해 줄 대목이 없지 않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예상보다 이른 1999년 11월에 외환위기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2000년부터 다시 경기가 하락세로 돌아서 제2의 외환위기가 오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신용카드 사용 확대 등을 통해 임기 말에는 겨우 성장세로 돌려놨으나 이는 결국 노무현 정부 초기 ‘카드사태’의 원인이 됐다. 성급한 위기 종료 선언이 또다른 위기를 불러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외환위기 때와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한은 총재는 더블딥 가능성까지 언급했지만 세계경제 회복세는 예상외로 빨라지고 있다. 미국은 소비 증가 등에 힘입어 회복세가 빨라지고, 중국도 1분기에 무려 11.9%나 성장했다. 현재로선 더블딥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국내 경제도 마찬가지다. 기획재정부는 어제 올 1분기 성장률이 예상(전분기 대비 0.8%)보다 두 배가 높은 것으로 전망했다. 이후에도 성장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낙관했다.
이런 국내외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외환위기 때는 위기 종료 선언을 너무 일찍 해서 탈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너무 늦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5% 성장을 낙관하면서 2%밖에 안 되는 금리 수준을 고집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결국 정부의 신중한 자세는 외환위기의 교훈이라기보다 위기 상황을 강조하면서 성장 위주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팀이 성장론자 위주로 짜였다는 점도 이런 가능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재정 긴축, 금리 인상 등 경기안정책 시행 시기를 놓칠 경우 물가 불안이나 자산 거품 등 경기과열 현상이 나타나고 이는 자칫 장기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의 ‘신중 모드’가 또다른 위기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중앙은행 총재의 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중수 신임 한은 총재는 “한국은행도 정부”라며 행정수반인 대통령만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밝힌 대로 “국내외 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금리 인상 등 출구전략을 단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그 시기가 늦어질수록 이명박 대통령은 고성장이라는 정치적 성과물을 따먹겠지만 이 정권이 끝난 뒤 대다수 국민은 두고두고 장기침체의 고통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김 총재는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정석구 선임논설위원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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