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기섭 논설위원
|
얼마 전 햇볕에 이끌려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나무에 파릇파릇 싹이 나고 있는데도 가지는 생기 없이 말라가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불현듯 2008년 가을의 충격적인 경험이 되살아났다. 부산에 볼일이 생겨 경부선 열차를 탔던 때 겪은 일이다. 별 생각 없이 창밖 풍경을 보면서 뭔가 눈에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집중해 보니 철로변 나무들이 생기를 잃은 듯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너무 과민한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쯤에 가자, 갑자기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이런 풍경은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도 별 차이가 없었다. 수도권의 나무들만 유독 거칠게 보인 것이다. 부산에서 만난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짐작할 만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서울을 오가다 보면 수도권 어느 지점부터는 공기조차 다르다는 걸 확연히 느낀단다. 그러면서 어떤 기자가 ‘요즘은 꽃들도 썩어가는구나’라고 쓴 글을 봤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자니 뜬금없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정말 도시의 자연이 소리 없이 죽어가는 건 아닐까? 이게 사실이라면 사람은 멀쩡할 수 있을까? 어쩌면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자각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착각일지 모르는 단편적 느낌을 대단한 발견인 양 떠들자는 건 절대 아니다. 인간의 삶과 밀접한 자연의 변화를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주목하자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미국의 여성 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이 1962년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써 환경오염을 고발한 것도 주의 깊은 관찰에서 시작된 일이다. 남들이 간과한 것을 끝까지 추적해 역사를 바꾼 카슨은 1953년 어떤 강연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말하면 저를 감상주의자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개인이나 사회의 정신적인 성장에 꼭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자연이 파괴될 때마다 우리의 정신적인 성장은 점점 더 지연되고 맙니다.” 생물학자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알바 노에는 <뇌과학의 함정>에서 카슨의 주장을 좀더 확장해 말한다. 노에는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 따위가 뇌 속에 있다는 관념을 거부하면서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 경험의 본질을 정하는 것은 도처에 있는 세계 자체다.” 이런 말도 한다. “살아 있는 동물의 상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동물과 주위 세계의 역동적인 맞물림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겪고 거기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형성되고 변화한다는 주장이다. 두 사람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측면을 지적하는 건 분명하다. 환경이 파괴되든, 사람들과 사회가 이상해지든, 나만 정신 바짝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진부할 수도 있는 이 이야기가 낯설게 들린다면 그만큼 현대인이 고립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4대강이 마구 파헤쳐지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해도 사람은 괜찮을까. 20대는 일자리가 없어 전전긍긍하고 10대는 공부에 지쳐 시드는데, 부모 세대는 마음 편할 수 있나. 비정규직들이 널려 있고 빈곤층의 시름이 깊어가는데, 나라는 평화롭게 성장할 거라고 믿어도 되나. 이런 문제들이 풀리지 않는 건 답을 몰라서라기보다 의지가 없어서다. 관계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의지가 있는 이들이 나서는 길밖에 없다.
신기섭 논설위원marishin@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