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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구 선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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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에서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2008년 11월12일 청와대에서 열린 언론사 논설실장단 오찬간담회 자리에서 처음 나왔다. 경색된 남북관계를 빨리 푸는 게 어떠냐는 한 참석자의 건의 겸 질문에 이런 취지의 답변을 했다. 이 대통령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 있는 말투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남북문제는 김대중 정권 초기에도 8개월, 노무현 정권 초기에도 10개월(?)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런 (대화 중단) 전략을 써왔다. 대화 중단하고 이대로 있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정권은) 북한과 색깔이 다르니 (다른 정권에 비해 대화 중단 기간이) 몇 달 더 걸릴 것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당시 이 대통령은 과거 정권과는 다른 방식으로 남북관계를 재설정하겠다는 의욕을 강하게 내비쳤다. “어느 정권보다 정당한 남북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그날 발언에서도 그의 의중이 잘 드러났다. 그가 말한 ‘정당한 관계’란 ‘비핵·개방·3000’이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잘 요약돼 있다. 핵을 포기하고 개방정책을 펴면,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가 되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그럼 ‘기다리는 전략’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금강산 관광은 문닫기 직전이고, 개성공단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한마디로 남북관계는 10여년 전으로 후퇴했다.
천안함 침몰 원인이 아직 최종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북한 소행이라면 그것 또한 ‘기다리는 전략’의 결과일 수 있다. 보수세력들은 “지난 정부 10년의 ‘대북 퍼주기’가 어뢰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엠비 정부 2년의 ‘기다리는 전략’이 어뢰를 불러왔다”고 보는 게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이 정부가 기존의 남북 합의를 무시하고 무리한 관계 재설정을 하느라 손 놓고 기다리는 과정에서 북한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부가 협상력을 발휘해 일찌감치 ‘정당한 관계’ 재설정에 성공했거나 지난 정부처럼 화해·협력의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했을 경우에도 북한이 이런 도발을 했을까?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결과적으로 이 정부의 대북정책은 ‘정당한 관계’ 재설정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무능했고, 북한의 강경대응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무모했다. 그렇다고 우리 장병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만약 사실이라면) 북한에 눈감자는 건 물론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엄정하게 대처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결국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이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했고, 그 결과는 남북관계의 파탄으로 현실화했다. 하지만 남북관계 파탄이 이 정부와 보수세력에 오히려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호기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이러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북한 동포를 같은 민족으로 여기는 게 죄악시되고 북한 지원은 말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가 돼가고 있다. 보수세력들은 공공연히 북한 응징을 거론한다. 이 대통령도 오늘 건군 이래 처음으로 전국 주요지휘관회의를 직접 주재한다고 한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보수진영에 유리한 ‘안보정국’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이 정부의 대북정책은 역설적이게도 꽤나 성공한 것처럼 비친다. 적어도 국내정치 측면에서만 보면 ‘기다리는 전략’이 불러온 남북관계 파탄은 보수세력이 내심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파탄과 안보 주도권 강화, 이 정부의 ‘기다리는 전략’이 보수진영에 안겨준 최고의 선물인 셈이다. 결국 이 대통령이 원칙을 강조하며 대책 없이 기다린 게 이런 상황이었는가. 그의 무능과 무모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석구 선임논설위원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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