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6.14 20:15
수정 : 2010.06.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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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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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현장에선 시간이 돈이다. 한국에선 특히 더하다. 발주자나 시공사 모두 공기 단축을 서두른다. 발주자로선 공사기간을 줄이면 제품 생산 등 투자목적을 조기에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시공사도 밤낮없이 공사하는 ‘돌관작업’으로 공사비를 줄일 수 있다. 당장은 인력·자재의 집중투입으로 시공비가 늘어나지만, 기계설비 투자나 임대 등 고정관리비용을 그 이상으로 감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 공사비 산정 때부터 공사기간을 짧게 잡고 노임 등 작업비용을 낮게 책정하는 게 현실이니 서두르지 않을 수도 없다.
한국의 건설업체들은 그렇게 성장했다. 428㎞ 거리를 불과 29개월 만에 닦은 19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돌관작업의 기법을 익혔고, 70년대 중동 진출에선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공기를 더 단축할 수 있다는 점을 앞세워 잇달아 공사 발주에 성공했다. 아득한 과거의 끔찍한 기억 같지만, 지금도 4대강 공사 등 많은 건설현장에선 돌관작업이 당연한 관행처럼 계속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런 시간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건설회사에서 고속승진을 하는 동안 쉴 짬도 없이 일하다 사무실에서 쓰러져 자기 일쑤일 정도로 ‘전력을 기울여 단숨에 일을 완성한다’는 돌관(突貫)이 몸에 익은 사람이다. 그가 3년도 채 안 남은 임기 안에 4대강 공사를 마무리하겠다고 서두르는 것도 체질상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간관념은 거기까지다. 4대강이나 세종시 문제와 달리 정작 다른 문제에선 결정을 미루고 미적댄다. 인사문제가 대표적이다. 지방선거에 나타난 민심을 반영해 인적쇄신을 서둘러야 한다는 여당 안팎의 요구에, 이 대통령은 어제 대국민 연설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새 진용을 갖추겠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당장은 않겠다는 뜻이다. 국정기조의 쇄신 주장에도 “큰 틀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고만 답했다. 그렇게 시간만 끌다 여론의 관심이 식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게 이미 한두 번이 아니다.
‘정치는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보는 이들에겐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겠지만, 실은 청와대의 그런 태도가 바로 정치적 타이밍의 기술일 수 있다. 정치적 이벤트는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좋은 소식을 앞세워 나쁜 뉴스에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도 그런 방법의 하나다. 예컨대 월드컵 첫 승 뒤 사람들의 심사가 한껏 너그러워진 시점에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이 나온 게 꼭 우연은 아닐 터이다. 연설 내용에서도 금융위기 극복의 치적을 강조(highlighting)하고, 4대강 사업이 경부고속도로처럼 성공적인 국책사업이 될 것이라고 포장(packaging)하고, 정책 문제나 안보는 정치공방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쟁점을 가르고(splitting), 인적쇄신 요구 등은 시간을 끌어 단계적으로 유야무야(phasing)하는 따위의 정치공학적 기술이 발휘된 것 아니냐는 분석(존 깁슨, <정치적 타이밍>)이 가능하다. 지방선거 뒤 들끊는 쇄신과 변화 요구에도 열흘 넘게 침묵 속에서 버틴 것이 결국 이렇게 제 뜻을 고집하려 시간을 벌려던 게 아니냐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계산이 통할까. “집권 3년차가 권력의 피크다. 무서운 게 없다. 그런데 다 무상하다. 길어야 한 해다. 4년차엔 아무도 말 안 듣는다. 사람을 불러 밥을 사더라도 모두 마음이 기울어 있다. 그러다 5년차쯤 되면 대통령이 밥 먹을 사람도 없게 된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정치권 인사의 말이다. 갈수록 권력의 힘은 줄어든다는 말이니, 제 뜻만 고집하고 꼼수로 시간을 끈다고 일이 이뤄질 수는 없다는 얘기가 된다. 마이동풍으로 민심에 귀 닫은 오만이 시간이 흐른다고 잊힐 리도 없다. 역대 선거가 이미 충분히 보여준 일이다. 시간은 결코 권력의 편이 아니었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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