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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6.24 21:22 수정 : 2010.06.25 14:20

정남기 논설위원

시장과 국가, 성장과 분배에 대한 담론은 경제학의 영원한 논쟁 대상이다. 이들의 경계선을 어떻게 긋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지형도가 달라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면서 자신을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고,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자본유출입 규제에 나선 이명박 정부가 또 그렇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지난 21일 눈길을 끄는 발언을 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에서 “소득분배 구조가 악화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사회통합이 와해되고 막대한 경제사회적 비용이 들 것이다”라고 했다. 또 “경제정책의 주안점을 성장률과 함께 성장의 내용이 서민과 젊은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조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뜻 진보적인 경제학자의 주장처럼 들린다.

박 전 대표가 한 걸음 좌클릭한 것일까? 쉽게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장 일변도의 정책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진보적인 주장들을 조금씩 수용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로 돌아가 보자. 세금 줄이고, 규제 없애고, 법치 확립해 7% 성장한다는 공약은 이 대통령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2009년 5월 미국 스탠퍼드대 초청 강연에서부터 달라졌다. 개인과 기업은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고, 정부는 소외된 약자를 확실히 보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배구조 악화와 고용 없는 성장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모델을 요구했다. 적어도 경제·사회 분야에서 그의 정책 비전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어떤 이유가 됐든 한나라당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사실 박 전 대표만이 아니다.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당내 목소리는 적지 않다. 감세정책과 4대강 사업에 대한 쓴소리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한구 의원이 있고, 전면 무상급식 수용을 주장하는 원희룡 의원도 있다.

한나라당은 또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이란 이슈의 폭발력을 실감했다. 사실 무상급식을 둘러싼 여야의 첨예한 논란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처음에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대결장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그 경계마저 무의미해졌다. 상당수 한나라당 출마자들이 이미 전면 무상급식에 동조한 상태다. 이 추세라면 무상급식 확대는 시간문제다.

이 대통령과 현 정부가 아무리 저항한다 해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30년대 처음으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을 때 공화당은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격렬히 반대했지만 2차대전 이후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구호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공통의 가치가 됐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귀중한 교훈들을 얻었다. 성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 빈부격차 확대와 사회 양극화는 국가적으로 더 큰 손실을 불러온다는 것, 무리한 감세나 재정지출이 국가 재정위기를 초래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경제정책 기조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조용한’ 노선 변화는 시대 상황에 맞춰 방향키를 약간 수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대권 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이념과 노선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정책과 비전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또 그것이 얼마나 시대와 민심의 흐름에 부응하는가 여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서전 <담대한 희망>에서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공통의 가치를 일관되게 역설했다. 특히 “정치가 (기존 이념에 맞춰) 이미 포장해놓은 기성품을 꺼내놓는 식이 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대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정치인들에게도 발상의 전환을 기대한다.


정남기 논설위원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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