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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26 20:36 수정 : 2010.07.26 22:03

여현호 논설위원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영화 <친구>)고 했던가. 우리도 그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는 그 시절 소악패가 저지를 만한 온갖 어설픈 비행을 조금씩은 다 흉내냈다. 그럴듯한 모임 이름도 지었지만, 하는 짓이라곤 나쁜 장난을 궁리하는 것뿐이었다. 겁나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배경을 지닌 친구들이 여럿이다 보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대수랴 싶었다. 함께하다 보니 금지된 일이라는 생각도 까맣게 사라졌다. 모두 패거리의 힘이다.

이인규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도 패거리의 힘에 기댔을 것이다. 이씨는 이십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해온 고위공무원이다. 무엇이 위법이고 어떤 일이 문제 될지 잘 알 사람이다. 그런 그가 명백하게 불법인 민간인 사찰과 정치인 감시를 지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런 일을 하면서 그가 수갑을 찬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론 웬만한 탈법은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론 잘못이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어떤 경우든 패거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같은 패의 뒷배를 믿지 않았다면 애초 그런 자신감도 없었을 것이고, 또 그런 패거리 문화에선 집단의식과 맹목적인 충성심이 법과 제도를 앞서기 마련이다. 실제 그는 동향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고 하고, 대통령을 흔드는 세력을 뿌리뽑자는 데도 누구보다 강경했다고 한다. 그런 이가 어디 이씨 한 사람뿐이겠는가.

패거리 짓기는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다. 원시시대부터 사냥으로 배를 채우고 외부 공격에서 보호받으려면 무리가 필요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무리에 충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소속의 욕구는 인간의 디엔에이(DNA)에 깊이 새겨졌을 터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선 패거리의 해악이 작지 않다. 나치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론 평범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이 히틀러의 국가민족주의에 빠져 나치당에 가입한 뒤엔 태연히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 아리안과 유대인으로 안과 밖을 가르고,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면 상대를 공격해야 한다는 방어기제와 적대감 따위 집단의식을 발동시킨 결과다.

패거리는 사람까지 바꾼다.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패거리에 소속되면 금세 집단 외부를 향해 얼토당토않은 공격성향을 드러내고,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된다. 라인홀드 니부어 등 여러 학자들의 설명이다.

그런 분석은 지금 한국 사회에 꼭 들어맞는다.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은 이명박 대통령을 힘들게 만든 촛불시위의 배후를 뿌리뽑겠다고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정치인 사찰도 영포라인의 대부라는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정적들을 견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 패거리의 이익을 앞세운 결과다. 법 제도나 공정성, 민주주의 가치 등은 하찮은 것처럼 내팽개쳐졌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적 이익을 챙긴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패거리는 곳곳에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한 젊은 유권자들을 두고 “이북 가서 살지”라는 막말을 한 것은 그와 똑같이 생각하는 패거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겐 전쟁 분위기 조성에 반대하는 이들은 죄다 ‘좌빨’인 모양이다. 그런 이들만 정부의 정책 결정을 주도하게 되면 합리적인 계산이나 장기적인 전략은 끼어들 틈이 없게 된다. 또 지방선거 참패 뒤 한나라당이 되레 강경 친위인사를 지도부로 뽑는 역주행을 한 것도, 제 편 안에서조차 다시 내 편과 네 편을 가른 탓이다. 애초 다짐했던 쇄신이 될 리 없다.

그렇게 패거리를 짓는다고 걱정거리가 사라지진 않는다. 같은 패거리만 횡행하는 지금 정권의 마비 증상을 풀기 위해선 패거리 밖의 다른 사람들도 섞어야 한다. 그래야 바깥의 소리도 현실감 있게 들리게 된다. 곧 있을 개각이 그나마 마지막 기회인 듯싶다.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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