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9.16 20:49
수정 : 2010.09.16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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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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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출퇴근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손으로 열심히 화면을 움직이느라 주변에 신경 쓸 짬들이 없다. 몇년 전만 해도 젊은이들이나 하던 일이지만 스마트폰 열풍이 불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게 됐다. 나 또한 별로 다르지 않다. 그 통에 취미 삼아 지하철 승객들 관찰하던 것도 요즘은 시큰둥해졌다. 이렇게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간 타인에 대해 점점 더 무감각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조금 다른 이유로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 얼마 전 퇴근시간에 인천행 지하철을 탔을 때 직접 겪었다. 집도 직장도 서울인지라 탈 기회가 없어 몰랐는데 여건이 상상 이상으로 나빴다.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는 통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덥기는 또 왜 그리 더운지. 그저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시간쯤 시달리다가 내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이들이 서민들 실정을 알겠나’라고 떠들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더 큰 충격은 내 옆에서 뜨거운 숨을 내뿜고 있는 존재를 사람으로 느낄 여유조차 생기지 않더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서 어떻게 무감각해지지 않겠는가.
요즘 스마트폰 열풍이 부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열악한 대중교통을 매일 이용하는 이들한테는 스마트폰이 훌륭한 탈출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조금 서글픈 일이다. 따분한 출퇴근시간을 버티게는 해줄지언정 그만큼 잃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현실감이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고 느끼기보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증강 현실’을 통해 접하는 게 훨씬 깔끔하다. 매끈하고 부담없는 이 ‘현실’의 매력을 거부하긴 쉽지 않다. 트위터 같은 서비스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리는 데 한몫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이 자신의 트위터 글을 읽고 있어 깜짝 놀랐다는 우스개 같은 이야기다. 트위터 세계에서 가까운 친구가 현실에선 사생활을 엿보는 침입자에 불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이쯤 되면 어느 쪽이 현실인지 불분명해진다.
타인을 현실감 있게 느끼지 못할 때 생기는 가장 큰 폐해는 고통에 둔감해지는 것이다. 요즘 급격히 늘고 있는 자살에 대한 사회적 무덤덤함이 이를 잘 보여준다. 최근 통계청 발표를 보면 지난해 10만명당 자살자가 31명으로, 한해 전보다 19.3%나 늘었다. 특히 10대의 자살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얼마 전엔 11살 소년이 경남 창원시 마창대교에서 아버지와 함께 뛰어내리는 장면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혀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른바 ‘명품녀’에게 쏟는 관심의 절반만 있어도 이처럼 평온할 수는 없다.
어쩌면 자살이 우리 바로 옆에 와 있다고 느끼지만 두려워서 피하는지도 모른다. 자살자의 유서를 연구한 일본 기자 후쿠오카 겐세이는 사람들이 죽음을 직시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숨겨진 풍경>이라는 책에서 “진짜 ‘죽음’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반면, 미디어가 제공하는 무색무취의 ‘가사의 죽음’하고만 친숙해져왔다”고 썼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연민과 타인의 고통을 알 수 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이제 자살 문제를 회피하면 안 될 때가 왔다고 느낀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곁을 떠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도 정면으로 봐야 한다. 미국 인지과학자 알바 노에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 용감하게 가려면 우리는 먼저 알려진 세계의 한계를 지나가야 한다”고 했다. 평범한 우리들은, 주변 세계의 한계를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추석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곧 온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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