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0.18 19:50
수정 : 2010.10.1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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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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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법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주당 우윤근 의원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정치권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열혈 개헌론자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자신의 의정 경험과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국 정치와 새로운 헌법질서>라는 제법 두툼한 책도 펴냈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과도한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를 뜯어고치지 않고는 한국 정치가 정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권력구조는 건설적 불신임제도 등을 둔 독일식 의원내각제다.
그의 진단과 처방이 모두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이런 식의 주장이 여권 개헌론자들한테 이용당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가 정치인으로는 매우 드물게 진지하고 사심 없이 개헌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만은 인정하고 싶다. 요즘 개헌의 군불을 때는 다른 정치인들에 비하면 진정성이 훨씬 돋보인다는 얘기다.
여권의 개헌 전도사를 자처하는 이재오 특임장관을 보자. 분권형 권력제도로의 개헌 당위성을 설파하려면 우선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부터 짚고 넘어가는 게 순서다. 그런데 그 대목은 쏙 빠져 있다. 고작 내놓은 명분이 “동서 및 계층 갈등 해소와 국민통합” 정도다. 마치 지금 대통령의 행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대통령제의 폐해를 고치자고 나선 형국이다. 그는 심지어 ‘4대강 전도사’이면서 동시에 ‘개헌 전도사’다. 기독교와 불교를 동시에 전도하겠다고 나선 꼴이다.
개헌은 누가 제대로 불씨를 댕기기만 하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를 위험물질이다. 국회의원들의 찬반 분포부터가 그렇다. 개헌론자들은 지금의 권력을 놓아버리는 데 두려움을 가진 세력과, 당분간 권력을 쟁취할 가망성이 없다고 여기는 세력의 연합군이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1등을 할 수 없음을 아는 고만고만한 학생들이 지금의 입시제도를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수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개헌 논의가 탄력을 받지 못하는 것은 위험성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과실은 탐이 나지만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가시에 찔려 치명상을 입을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 한복판에 청와대가 있다. 개헌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내심을 숨긴 채 이리저리 주판알을 튕기는 모습이 역력하다.
개헌 문제에 관한 한 ‘대통령이 나서면 될 일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개헌의 속성상 대통령이 빠져서는 결코 진도가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결심하기에 따라서는 개헌의 묘책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자신이 경험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에 대한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다. 개헌의 선결조건은 국민의 공감대 형성이다. 아직은 개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름길은 단 하나, 현직 대통령이 나서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대통령 권한 남용의 상징인 4대강 사업을 접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따지고 보면 묘책이랄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이 대통령이 얻는 게 무엇이냐고 물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반대급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임기 말까지 레임덕에 시달리지 않고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일단 개헌의 폭풍이 불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 현 정권의 실정도 함께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역대 대통령 모두가 임기 말에 꿈꿨으나 이루지 못한 개헌을 성사시킨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한테 권력이 송두리째 넘어가는 것에 대한 걱정을 덜 수도 있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지만 이 정도만 돼도 한번쯤 모험을 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럴 용기와 배짱이 없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이다. 배후에서 은근슬쩍 조정하다가 과실을 챙길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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