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0.25 20:23
수정 : 2010.10.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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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구 선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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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쓰는 내내 우울했다.” 조정래 작가는 최근 내놓은 장편소설 <허수아비춤>의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했다. 원고지 한칸 한칸을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등 재벌들의 구린내 나는 온갖 비리로 채워나가며 암담함을 느꼈으리라. 소설 속의 이야기는 삼성·현대그룹 등의 비자금 사건에서 보았듯이 생생한 우리의 현실 그대로다. 지금도 한화, 태광, 씨앤(C&)그룹 수사에서 그 장면들이 재연되고 있다. 검찰은 이런 기업들의 비리를 뿌리뽑겠다며 일사천리로 수사를 진행중이지만 이를 보는 마음은 왠지 개운치가 않다.
검찰의 속 보이는 행보부터가 그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이후 1년여 만에 칼을 빼든 대검 중앙수사부가 겨냥한 곳은 다 망해가는 재계 순위 60위권의 씨앤그룹이다. 호남지역에 기반을 둔 씨앤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때 급성장했다. 파다 보면 기업 내부 비리뿐 아니라 당시 정권의 유력인사들이 걸려들 개연성이 높다. 벌써 전 정권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된다. 그럼 호남기업이라고 눈감아줘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당연히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상대방의 명예와 배려를 소중히 하면서 정정당당히 수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검찰은 그동안 여러 차례 수사의 형평성을 잃었다. 거대재벌에도 지금 같은 신속함과 결연함을 보이며 칼을 들이댔더라면 이번 수사도 국민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삼성 비자금 사건이 불거졌을 때 검찰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만지면 큰 탈이라도 날 듯이 주저주저하다가 특검에 떠넘기고 손을 털었다. 그런 검찰이 다 죽어가는 잔챙이 그룹을 상대로 벌이는 수사에 어떻게 박수를 보낼 수 있겠는가. 한화는 ‘삼성과 동등한 대우’를 기대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까지 나돈다.
기업을 감시·감독해야 하는 정부기관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재무상태와 자금 흐름 등 온갖 기업정보를 손금 들여다보듯 하고 있는 금융감독원만 제대로 구실을 해도 기업 비리의 상당부분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비자금 조성 통로로 자주 이용되는 차명계좌만 해도 그렇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차명계좌에 수십억원이 들어 있다고 폭로했을 때 금감원은 한동안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화나 태광의 경우도 수많은 차명계좌가 있다고 하는데, 왜 이런 차명계좌의 개설·유지가 아직까지도 가능한지 금감원은 답해야 한다. 국세청은 수백억원의 탈세를 적발하고도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간다. 사실상 기업 비리 방조범이다.
정부기관이 이러는 가장 큰 이유는 기관장들이 정치화되고 조직 기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관장들의 관행화된 윗선 눈치보기로 기관의 설립 취지와 목적은 무시되기 일쑤다. 기업들에 대한 감독·검사권과 징세권, 조사권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행사함으로써 기관의 존립 의의를 스스로 부정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검은돈의 유혹에 빠져드는 일부 공직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언론의 보도 태도도 가관이다. 수사 대상 기업이 어디냐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한다. 기업 비리의 규모나 심각성은 부차적이다. 태광과 씨앤 수사의 경우 모든 언론들이 달라붙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삼성 비자금 사건 때 대부분 언론은 삼성 비리 취재는 뒷전으로 미뤄둔 채 오히려 삼성 편에 서서 김용철 변호사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기도 했다. 언론들이 지금 보이는 열정의 반만이라도 삼성 비리 취재에 쏟았어도 삼성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정래씨는 이런 소설을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을 소망하면서 <허수아비춤>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소설이 완전히 필요 없게 될 세상은 오지 않을 것임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화와 태광, 씨앤에 대한 검찰 수사도 결국은 적당한 정치적 효과만 거둔 채 마무리될 것이다. 금권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짜여 있는 재벌체제의 핵심은 제대로 도려내지도 못하면서. 우울하다.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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