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2.30 20:24
수정 : 2011.04.0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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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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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을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 많지만 가장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불안한 남북 관계다. 특히 반목과 갈등을 조장하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을 보는 심정이 참으로 답답하다. 해가 바뀌면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전쟁을 막지 못한다’고 떠드는 이들이 얼마나 전쟁이 무서운지 깨달으면 좋겠다는, 부질없어 보이는 희망마저 품게 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남북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는 핵심 세력의 하나가 언론이다. 많은 보수언론은 때론 정부의 미적지근함을 탓하고, 때론 국민들의 안보 불감증을 탓하며 ‘단호한 응징’을 외친다. 안보 상업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이런 행태를 접하며 떠올린 인물이 하나 있다. 이스라엘의 언론인 기드온 레비다. 이스라엘 지식인층한테 영향력이 크다는 신문 <하레츠> 소속으로 30년 가까이 일하면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위해 외롭게 싸우는 사람이다. 29살 때인 1982년부터 이 신문에 글을 써온 그는 요즘 자국 정부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을 아주 호되게 비판한다. 한 예를 들자면, 2008년 12월부터 두달 동안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으로 1000명 넘게 팔레스타인 희생자가 발생한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건 전쟁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기력한 이들에 대한 거친 맹공이다. 목표도 없고 쓸데없으며 범죄와 같은 공격이다.”
자국 정부를 이 정도로 비판하는 건 어디서든 쉽지 않지만, 특히 요즘 이스라엘에서라면 모든 것을 걸 각오가 필요하다. 지난 9월 자신의 책 <가자지구의 형벌> 출판에 맞춰 영국 인터넷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른 목소리에 대한 체계적인 압박 때문에 이스라엘의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지적했다. 진보정치 세력은 힘을 잃었고 언론은 한목소리로 팔레스타인 점령을 옹호하고 있단다. 그는 언론의 이런 태도가 검열이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독자들의 구미에 맞추려는 상업적 이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레비는 “이런 편향이 가장 위험하다”며 “정부도, 독자도, 발행인도 모두 만족하니, 저항도 생길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가 신문에 칼럼을 쓸 때마다 분노한 독자들의 구독 중단 요구가 쏟아져 들어온단다. <하레츠>라는 신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묵묵히 그를 지지하는 독자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거리로 내쫓겼을지 모른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 상황은 훨씬 낫다. 남북 대결에 반대하는 세력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남북 문제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처럼 다른 민족 간 문제도 아니다. 그러니 남북 평화를 외치는 데는 대단한 결단이나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약간의 균형감각만 있어도 족하다. 아니 냉정한 비용 계산만 할 수 있어도 된다. 평화의 비용이 전쟁의 비용보다 적다는 건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사람 목숨은 값도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평화를 이야기하는 언론인이 적은 건, 이스라엘 언론과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부에 밉보이지 않아 좋고, 보수적인 독자들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아 좋고, 무엇보다 언론사 경영진이나 간부들 입맛에 맞춰 좋고 말이다.
물론 언론인 개인이 결단한다고 언론사 전체의 논조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열심히 싸우고 애쓰는 언론인이 있더라도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두 한통속으로 취급되기 일쑤지만,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는 언론인들이 꽤 있을 거라고 믿는다. 당장은 막막해도 그들의 노력이 모이고 쌓이면 조금씩 변화가 올 것이다. 열심히 싸워 신입사원 대상 노조 설명회까지 따낸 <한국방송>의 새 노조가 그 증거다.
이 글이 올해 한해 양심을 지키려 애쓴 언론인들, 나서서 싸우진 못해도 고민하고 갈등한 언론인들에게, 새해에는 더 힘을 내라는 덕담으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또 사람들이 양심있는 언론인들을 지지하고 후원하기로 마음먹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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