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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1.20 20:39 수정 : 2011.01.21 10:08

신기섭 논설위원

몇년 전 영국에서 한 해 동안 살았다. 머문 기간이 워낙 짧아 그 나라에 대해 말할 자격은 못 되지만, 한가지 색다른 경험만큼은 꼭 말해보고 싶다. 요즘 한국에서 쟁점이 되는 ‘무상의료’ 이야기다. 영국은 외국인도 1년 이상 체류 비자가 있으면 무상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이 덕분에 나와 내 가족도 의료비 걱정 없이 살았다. ‘학생’과 ‘학생 가족’ 자격으로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세금도 한푼 내지 않으면서 말이다.

영국 의료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낮은 문턱’이다. 이는 동네 의원에 등록할 때부터 확연히 알 수 있다. 의료 서비스를 받으려면 우선 집에서 가까운 의원에 등록해야 하는데 이 절차가 아주 간단하다. 의원에 찾아가서 집 주소와 가족 이름을 적어주면 그만이다. 내 경우는 여권도 보여주지 않았다.

병원을 이용하면서도 놀라움을 여러번 느꼈다. 등록을 마친 뒤 처음 한 일은, 한국에서 정기적인 안과 검진을 받던 가족 가운데 한명이 종합병원을 갈 수 있게 진료 의뢰서를 부탁한 것이었다. 영국에서 병원을 이용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식의 얘기가 많기에, 처음엔 종합병원 구경하려면 족히 몇달은 걸리려니 했다. 처음 만난 동네 의사의 느긋함도 이런 심증을 더욱 굳히게 했다. 한국 의사의 소견서와 그동안 쓰던 약까지 가져갔으니 진료 의뢰서나 써주면 좋으련만, 이것저것 묻더니 간단한 검진까지 하는 것이었다. “역시 그렇군”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사가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환자 놔두고 뭔 통화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보니 진료 예약을 위해 종합병원 쪽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었다. 저쪽은 예약이 밀려 곤란하다고 하는 듯한데, 우리 쪽 의사는 “무조건 빨리 봐줘야 한다”고 고집했다. 한참 만에 통화를 끝낸 의사는 환하게 웃으며 “내일 아침 바로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 다음날 만난 종합병원 의사는 “동네 의사가 잘 몰라 응급 상황인 줄 알았나 본데 걱정할 것 없다”며 허허 웃었다.)

동네 의원의 신속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급하게 진료가 필요해 아침 일찍 전화했지만 이미 예약이 밀려 있었다. “이제 진짜 영국 병원의 현실을 겪게 되나”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전화 상담을 받게 해줄 테니 전화 끊고 조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니 정말 의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 상담을 끝낸 뒤 의사는 “처방전을 써놓을 테니 편할 때 와서 약을 사라”고 했다. (동네 의원에서 처방해주는 약은 한국처럼 약국에 가서 사는데, 약 종류나 분량과 상관없이 값이 일정한 것으로 안다.)

단편적인 경험밖에 없으니 이런 신속함이 예외적인 것인지 여부는 모른다. 다만 ‘우리집 주치의’의 친절은 분명 의사가 돈을 신경쓰지 않는 의료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사와 환자가 오로지 진료만을 위해 만나는 관계, 무상의료의 아주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친절한 ‘공짜 의료’를 맛봤으니 한국 병원에 불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체감상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그만큼 한국의 의료 서비스도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건강보험료나 진료비가 큰 부담이 안 되는 중산층 이상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한국의 빈곤층이나 큰 병을 앓는 환자라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그들 처지에서 보면 영국의 무상의료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 만큼 높은 수준이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 의료의 힘이며 필요성이다.

요즘 한국의 무상의료 논쟁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가장 시급한 일은 돈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진짜 핵심은 ‘진보 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층 문제인 것이다. 건강보험의 보장 범위를 전체적으로 확대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여기에만 매달리다가 빈곤층에 소홀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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