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2.21 18:57
수정 : 2011.02.21 19:01
|
여현호 논설위원
|
여현호 논설위원
지난 토요일 오전 관악산에 올랐다. 봄볕 같은 우수 무렵의 아침 햇살을 여유롭게 즐기다 배낭 훌쩍 메고 집을 나섰다. 7~8분 걸으면 바로 등산로인 산자락 동네에 사는 특권이다. 산에는 아직 약동하는 초록은 없다. 길가엔 잔설이 군데군데 하얗고, 벗은 나무 사이로 건너편 능선이 다 보인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몸이 더워진다. 재킷을 벗고 맞는 바람이 한결 가뿐하다. 몇 해 전 산불을 맞았던 비탈에도 양광이 가득하다. 키 작은 나무들이 제법 컸다. 바위 무더기를 돌면 만나는 진달래들도 지난봄처럼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흥겨움이 지나쳤을까. 무심코 뒤로 젖힌 등산용 지팡이로 뒤따르는 이를 불편하게 했다. 미안하다. 자주 다니는 한적한 길이어도 산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초반에 무리하다 보면 쉬이 지치기 마련이다. 잘나갈수록 삼가야 하는 것은 권력만의 일이 아니다.
갈림길에 섰다. 평탄한 왼쪽 우회로를 두고 힘든 오르막을 택한다. 내친김에 정상 너머 반대편 바위능선까지 탈까 궁리하다가 금세 헉헉대면서 마음을 접는다. 겨우내 방치한 지금의 체력으로는 탈나기 십상이다. 겨울등산일수록 한정된 체력을 잘 배분해야 한다고 했다. 한정된 자원의 배분이 중요하기로는 국가재정이 더하다. 4대강 사업에 단기간에 수십조원을 쏟아넣은 이명박 정부에선 이미 체력소진 징후가 뚜렷하다. 저소득층 공부방 예산 등 꼭 필요한 복지예산이 곳곳에서 구멍이 났다. 꼭 필요한 사업이 미뤄진 예는 또 얼마나 많을까. 딱히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4대강에 돈을 쓰는 바람에 미래 성장 동력을 육성하는 데 소홀해졌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환경파괴로 인한 재앙도 위협이다. 장차 이를 견딜 수 있을까.
오르막 빙판이다.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직 한겨울인 정상 부근 바위길을 조심조심 오른다. 내가 올라가는 길은 다른 이의 내려가는 길이다. 내리막 빙판은 훨씬 두려운 법이다. 밧줄을 잡고 울먹이는 이도 있다. 서로 양보하고 기다려야 한다. 무작정 치달아 오르려다간 자칫 싸움이나 사고가 난다. 그렇게 제 목표만 고집한 게 지금 정부다. 4대강 하나만 잡고 있던 국토해양부는 전세대란은 나 몰라라 했다. 위험 신호는 진작부터 있었지만 한참 수수방관이었다. 그래도 문책은 없었다. 목표만 보고 뛰라는 대통령 탓이다. 그런 식으로 부자감세 정책 등도 내내 고집했지만 기대했던 ‘낙수 효과’(trickle down effect)는 없었다. 양극화와 민생 불안만 더 심해졌을 뿐이다.
한 사람씩 바위틈을 내려오는 이들에게 길을 비켜주다 오른 정상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오래 있을 수 없다. 바람 못지않게 햇빛도 풍성했던 능선길을 버리고 계곡길로 하산한다. 계곡엔 얼음이 오래간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아이젠을 꺼냈다. 지지난해 이맘때 바로 저 아래 돌계단에서 미끄러졌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경험에서, 또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이는 어리석다. 다리 힘이 풀리는 하산길에 사고가 잦듯이, 권력도 저물 무렵 온갖 비리와 스캔들이 불거진다. 기강과 긴장이 풀린 탓에 늦기 전에 한몫 챙기려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권력의 한창때와는 달리 쉽게 넘어가는 사건도 없기 때문이다. 장수만 전 방위사업청장의 비리 의혹이 그런 예다. 정상의 성취감 뒤에 등산의 감흥이 줄듯 정권에 대한 기대와 관심도 줄어든다.
하산길은 그래서 길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쉽게 가는 길도 없다. 그런 길을 찾으려다 되레 낭떠러지를 만날 수도 있다. 혹시 지금의 개헌론이 그런 게 아닐까. 그런 헛된 시도보다는 산에 올라오는 이들의 땀으로 상기된 얼굴을 향해 인사라도 건넬 일이다.
휴일 산 아래에선 집권 4년째로 접어드는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을 다녀와 한 말이 화제다. 자신은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평지를 뛰는 것이라고 말했단다. 뒷산을 다녀온 것은 같은데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는 산길을 평지처럼 달리는 사람일까, 아니면 가상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yeopo@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