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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04 20:06 수정 : 2011.04.04 20:09

김종구 논설위원

이명박 대통령이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와 관련한 특별기자회견을 하고 난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들에 실린 사진은 거의 대동소이했다. 이 대통령이 고개를 숙이거나 안경을 고쳐쓰는 장면 등이었다. 하지만 사진기자 카메라 앵글에 잡힌 대통령 사진 중에는 신문에 실리지 않은 의외의 표정도 있었다. 회견이 끝난 뒤 기자들과 악수하며 활짝 웃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회견 결과가 무척 흡족했기 때문일까. 대통령의 표정은 믿기지 않을 만큼 밝고 화사했다. 이날 회견은 결국 이 대통령의 파안대소로 끝난 행사였던 셈이다.

이날 회견의 공식 명칭은 그냥 ‘특별기자회견’이었다. ‘대국민 사과’ 등의 단어는 없었다. 이런 중립적인 이름은 물론 청와대가 작명한 것이다. 하기야 ‘특별’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도 했다. 이 대통령이 그토록 기피하던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 응한 것이나, 준비한 메모도 보지 않고 척척 답변한 것 등은 ‘특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이날 회견이 특별했던 것은 이런 사과문 발표에 당연히 수반되는 침통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거기다 예기치 않은 장소, 예기치 않은 시간에 마주친 웃음처럼 특별한 것이 또 있을까.

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이번이 벌써 다섯번째다. 횟수 면에서 이미 역대 어느 대통령도 달성하지 못한 고지를 점령했다. 지금의 추세를 봐서는 기록 경신의 고공행진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박리다매’인지 질적인 진정성의 무게는 다섯번을 다 합쳐 봐도 역대 대통령 사과 한번에도 훨씬 못 미쳐 보인다.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등의 침통한 음성에서 전해져오던 나름의 고뇌와 번민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단지 사과의 대상이 ‘아들 비리’와 ‘정책적 사안’으로 달라서만은 아닌 듯하다. 본질적으로 이 대통령 마음속 깊은 곳에 진정으로 미안해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유전인자가 결여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불쑥불쑥 들곤 한다. 이 대통령의 진정성 결여증은 이미 촛불시위 때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가 뒤에 태도를 표변한 것에서부터 확인됐다. 그 뒤로도 ‘사과’ ‘유감’ 등의 단어는 더욱 울림을 잃어갔다. 이런 말이 너무 쉽게 그리고 자주 나오다 보니 식상함과 공허감도 커간다. 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신뢰를 더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

사실 신공항 백지화에 대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우리 정치사에 길이 기억될 만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선거 때만 되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한국 정치의 고질병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우리 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대통령이 그동안의 과정을 소상히 밝히는 것이 필요했다. 공약이 채택된 경위에서부터, 대통령 취임 뒤에도 몇 차례나 신공항 추진 의사를 밝힌 사정 등에 대한 정직하고도 면밀한 복기는 이런 구태를 추방할 수 있는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었다. 공약 파기의 당사자이자 국정운영 최고책임자로서 공약 남발 방지 대책까지 제시했다면 금상첨화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이런 의문에 전혀 답하지 않았다. 과거 판단착오를 뉘우치기에 앞서 국익을 위한 대승적 결단을 강조했고, 위선적 정치행태에 대한 고해성사 대신 지도자의 책임의식만을 앞세웠다. 대통령으로서 책임질 뜻도, 또 그럴 마땅한 방법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리고 득의만면한 웃음꽃으로 회견을 끝내고 만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회견으로 무책임한 공약 제기에서 공약 파기, 말뿐인 사과에 이르는 전 과정을 완결짓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허무주의도 더욱 깊어졌다. 그것은 공약 파기보다 이 대통령이 저지른 더 무거운 죄일지도 모른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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