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7.14 19:01
수정 : 2011.07.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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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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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도청의 법적 책임을
비켜가도 녹취록 전달 의혹으로
도덕적 파산선고는 내려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갈 모양이다.
한국방송(KBS)이 지난 11일 “회식을 한 뒤 잃어버린 것 같다”고 밝혔을 때 ‘수사가 미궁으로 갈 가능성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민주당이 수신료 인상 문제를 논의한 최고위원회 회의 내용이 도청됐다고 지난달 24일 의혹을 제기한 직후 희한하게도 의혹 당사자인 장아무개 기자가 휴대전화와 노트북컴퓨터를 분실했단다. 경찰이 압수수색한 새 휴대전화와 노트북은 말 그대로 ‘허당’이고, 도청 여부를 가려줄 것으로 기대됐던 물증은 사라졌다. 장 기자가 도청을 부인하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한국방송은 한 자락을 더 깔았다. 민주당 회의 내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회의에 관련된 제3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이 민주당 회의 내용이라며 공개한 녹취록과 비슷한 것을 한국방송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언론자유 수호와 취재원 보호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제3자가 누구인지, 그가 무슨 노릇을 했는지 공개하지 못하겠단다. 경찰로선 한국방송의 도청 의혹을 해소해줄 사람조차 조사할 길이 막막한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선교 의원도 버티기에 들어갔다. 그는 “경찰에 나갈 이유가 없고, 녹취록을 누구한테서 받았는지도 공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 의원의 완고한 태도로 볼 때 그가 경찰이 요구한 15일까지 출석할 리는 만무하다.
이쯤 되면 도청 의혹의 실체는 안갯속이다. 경찰이 조금 살살 수사해 준다면 의혹이 흐지부지될 여건은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0여일 동안 한국방송이 이런 시나리오를 그려왔다고 추정한다면 억측일까?
하지만 그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도 한국방송은 오욕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운 좋게 도청의 법적 책임을 비켜가도 이미 도덕적 파산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민주당 회의 녹취록이 한나라당에 전달됐다는 사실, 바로 한나라당과의 부적절한 거래 의혹에서 한국방송은 자유로울 수 없다. 녹취록을 한나라당에 건네지 않았다면 한국방송이 움츠리고 고민할 이유가 없겠지만, 불행하게도 여태껏 한국방송은 어떤 식으로든 이 거래 의혹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도청은 없었다”고 자꾸 표적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국방송이 비난받는 핵심 이유다. 백번을 양보해, 회의 내용을 엿들은 것은 기자 개인의 공명심에서 비롯된 일이라 쳐도 녹취록 전달은 ‘윗선’의 지시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전혀 차원이 다른 행위다.
거짓말은 또다른 거짓말과 궤변을 낳기 십상이다. 도움을 줬다는 ‘제3자’ 이야기가 전형적으로 그렇다. 솔직히 제3자의 존재 자체가 미심쩍지만, 만약 그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한국방송이 공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한국방송이 비공개의 이유로 든 언론자유와 취재원 보호는 이번 파문에 적용될 보호막이 아니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중요한 제보를 한 사람이 당할 불이익을 막는 장치로 취재원 보호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방송의 민주당 회의 내용 ‘입수’는 수신료라는 자신의 ‘밥그릇’과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는 행위였을 뿐, 보도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방송으로선 오히려 제3자를 공개해 도청을 둘러싼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줄이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태도다.
한국방송의 모습에선 ‘당장의 법적 책임만 피하면 그뿐’이라는 생각 이외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착각이자, 그야말로 소탐대실의 짓이다. 지금 한국방송엔 ‘진실’ 이외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나마 진실을 고백해야 다 죽어가는 신세에서 간신히 살아날 길이 열릴 수 있다.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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