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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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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배워야 할 복지망국론은
‘싼 복지가 나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망국론’이 그리스, 미국을 돌아 일본까지 왔다. 재정적자로 일본의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총리가 물러나자 일본을 잘 보라고 한다. 그리스는 한국과 너무 다르고 미국도 복지 때문이 아니라 오사마 빈라덴을 잡는 데 돈을 퍼부어 비교 대상으론 적절하지 않다. 일본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지난 2009년 일본 민주당은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라는 획기적인 복지공약을 내세워 54년 자민당 아성을 무너뜨렸다. 민주당은 아동복지는 물론 연금·의료·빈곤 등 생활보장의 혁신을 꾀하는 복지 패러다임을 제안했다. 문제는 실행력과 재원이었다. 민주당은 낭비사업을 재편하면 증세를 하지 않고도 재원은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민주당의 안이한 생각은 관료들의 반발과 관성의 법칙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지난해 증세 카드를 꺼내들었다가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고 간판 정책인 어린이수당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당의 시행착오는 재원 확보 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데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민당 정권의 유산에서 비롯됐다. 토건사업에 돈을 쏟아부은 자민당 정권은 재정적자와 함께 1000조엔에 가까운 국가부채를 민주당에 넘겨주었다. 제대로 된 복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일본의 기존 복지체제는 낮은 공적 사회지출·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정책, 곧 가족의 과도한 복지 부담이 특징이다. 일본의 제도를 참고한 한국과 비슷하다. 일찍이 1961년 국민개보험·개연금 시대를 열었지만 저복지·저부담을 기초로 취약계층에 선별적으로 한정됐다.
빈민운동가인 유아사 마코토는 이런 일본을 ‘미끄럼틀 사회’라고 한다. 무심코 미끄러지면 사회안전망 어디에도 걸려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추락한다는 뜻이다. 2007년 기타큐슈에서는 52살 남성이 미라로 발견돼 충격을 준 일이 있다. 일거리를 찾지 못한 그는 복지사무소가 생활보호지원 포기를 강요하자 굶어 죽었다. 일본 경제는 내수 중심인데 내수가 위축돼 경제가 안 돌아간다. 복지가 안 돼 있어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의 침체는 과잉복지가 아니라 거꾸로 취약한 복지에 원인이 있다.
그런데 복지 처방을 내리자니 재정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곧 일본은 복지 투자를 제때 하지 않으면 경제도 복지도 다 놓칠 수 있다고 일러준다. 일본에서 배워야 할 복지망국론은 ‘싼 복지가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올해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합친 정부 세입이 국내총생산의 25.2%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평균에 비해 10%포인트가량 적다. 세입이 적다 보니 재정지출 또한 빈약하다. 적은 세입을 방치한 채 복지 지출을 억제할 것인가, 아니면 세입을 늘려 보편복지에 부응할 것인가? 이는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나은 길로 갈 것인가 하는 물음과 다르지 않다.
“한국의 경제·사회 시스템에서 혜택을 많이 받은 우리가 나라의 미래를 위해 세금을 더 내겠다. 부자증세를 해달라.”(한국 부자)
“공생발전 하자고 했는데 재정건전성이 걱정거리였다. 기부도 좋지만 세입이 늘어나 복지대통령 소리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대통령) 오늘 한국 부자들의 청와대 회동에서 이런 진풍경이 연출될 가능성은 소수점 몇 자리의 확률일까? 미국, 프랑스, 벨기에에서 현실이 된 부자증세론이 유독 한국에서는 먼 나라의 아득한 이야기로 들린다. 누구보다도 부자들이나 대통령이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이 말만 앞서는 공생발전론과 생색내기용 공생목록을 주고받는 데 그치는 연출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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