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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17 19:31 수정 : 2013.01.17 19:31

정영무 논설위원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처지가 난감하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선거 전 복덩이로 칭송받던 시절이 벌써 까마득하다. 노인정에서는 단연 내가 최고 인기였다. 65살 이상 어르신들에게 죄다 다달이 20만원씩 드리겠다는 약속에 효자가 따로 없다고 춤을 추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눈에 선하다. 당차게 뻗쳐서 주름진 손에 입맞춤하리라 마음먹기를 수백만번도 더 했건만….

나 ‘기초연금’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세상을 바꾸는 약속’이라는 공약집의 얼굴로 선을 보였다. 지키지 못할 공약은 하지 않는다는 다짐과 함께. 나는 여전히 그녀를 믿는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공약은 폐기하자는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들린다. 영국 노동당보다 더 왼쪽이며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는 말바꾸기도 나온다. 여당 대표라는 분이 “선거기간 너무 세게 나갔던 부분은 다시 한번 차분하게 여야가 같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공공연히 떠들 때는 쥐구멍을 찾고 싶다. 나는 그저 선거용이었던가?

내년부터 65살 이상 노인들에게 매월 20만원씩 주려면 한해 7조~8조원이 더 든다고 한다. 큰돈이다. 재원을 꼼꼼히 따져봤다는데, 막상 닥치니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 따라서 그렇게는 못하겠고 수급액 또는 대상을 줄이거나 국민연금에 부담을 좀 떠넘기는 식으로 해볼까 하는 궁리가 나오는 모양이다. 나를 국민연금과 통합운영하겠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하지만 관리를 효과적으로 하겠다는 뜻으로 알았지 국민연금 가입자에게 손실을 안기면서 내 배를 불리는 식으로 되리라는 생각은 나도 유권자들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세상이 다 어렵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고단한 어린 시절을 견뎌야 했고 젊어서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경제성장의 주역이 됐던 노인들의 처지는 무척 어렵다. 중위소득 50% 미만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평균 13%인데 이 나라는 45%에 이른다. 노인 넷 가운데 세 분은 자기 소득이 없다. 노년이 가난하고 고단한 이유는 공적 노후소득보장제도가 부실하고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출근길 폐지 줍는 노인은 덤덤한 일상이 됐고 노인 취업박람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75살 이상 노인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의 8배가 넘는다니 가히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할 만하다.

노인들에겐 내가 생명줄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인 빈곤율을 낮추기 위한 모색을 해보았으나 나만큼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방안이 없다고들 한다. 당장 빈곤율을 10%포인트 이상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 어르신들만 좋은 게 아니다. 자식들도 부모님 용돈 부담이 줄고 소비를 살리는 효과도 있다.

무상급식 때 이건희 회장 손자 들먹이던 사람들은 으레 나를 두고는 이 회장에게도 돈을 줘야 하느냐고 따진다. 나는 이 회장 지갑에도 당당히 한푼 보태고 싶다. 어린이에게 보살핌이 필요하듯 노인들은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가난한 노인이나 부자 노인이나 기본적 욕구가 다르지 않다면 똑같이 손을 잡으련다. 부자 돈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방식으로는 불평등과 빈곤을 해소하지 못한다. 보편적 증세로 우리가 낸 것을 돌려받는다면, 곧 냉장고 용량을 키울 때 우스꽝스런 ‘냉장고에 코끼리 넣기’ 따위의 논란을 떨칠 수 있다.

나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2007년 대선을 열흘 앞둔 날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노인회를 찾아 비슷한 약속을 했지만 선거 뒤에 물거품이 됐다. 나는 체면을 잃고 노인들은 상처를 입었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나는 노인이 행복한 나라에서 이름값을 하고 싶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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