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29 19:18
수정 : 2013.01.2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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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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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장이던 2009년 초의 일로 기억된다. 작가 황석영씨에게 신문 연재소설을 쓸 생각이 없는지 의사를 물었다. 딱 부러진 확답 없이 말이 오가던 무렵,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강남을 소재로 한국 자본주의와 지배층의 허상을 다룬 작품을 구상중이라는 거였다. 옳거니, 무릎을 쳤다. 소재도 맞춤했거니와 황 작가가 술자리에서 밝힌 이런저런 가제목 가운데 하나가 마음에 쏙 들었다. 강남공화국 잔혹사.
하지만 ‘강남 드라마’는 <한겨레> 몫이 되지 못했다. 황 작가는 이미 한 출판사와 출간을 약속한 상태였고, 2010년 <강남몽>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작가는 소설 말미에서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목에 ‘몽’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강남공화국 잔혹사>거나 <강남제국 잔혹사>였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소설의 압권은 강남 개발 정보를 이용한 투기꾼들이 불가사리처럼 땅을 먹어치우는 장면이다. 정권조차 땅장사에 나선다. 1970년 초 서울시청 도시계획과장은 세무공무원 출신의 부동산중개업자 박기섭 등을 동원해 강남 탄천 일대의 땅을 사모은다. 서울시장과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도적으로 기획한 대선자금 마련 프로젝트다. 청와대와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서 나온 자금으로 부동산중개업자들이 매입한 토지는 모두 23만7000여평. 땅이 확보되자 서울시장은 대대적인 남서울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땅값은 무섭게 치솟기 시작한다. 이듬해 초 도시계획과장은 평당 4000~6000원에 산 땅을 3~4배 가격에 팔아치워 지금 돈으로 수천억원에 해당하는 정치자금을 청와대에 상납한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황당 스토리’ 같지만, 이 이야기는 ‘리얼’이다. 서울 도시계획의 산증인으로 1970~77년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2003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손 전 교수는 당시 땅 매입과 처분 작업을 주도한 윤아무개 도시계획과장한테서 1995년 관련 자료를 몽땅 건네받았다고 한다. 그런 시절이니 정보에 한 발짝만 앞선 이라면 강남 투기는 ‘땅 짚고 헤엄치기’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강남몽>을 떠올린 것은 돌연 사퇴한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 때문이다. 김 후보자는 서울과 수도권에 소유한 여러 부동산으로 투기 의혹에 휩싸였지만,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땅 674㎡(204평)가 특히 문제였다. 그가 “75년 8월1일 모친이 두 손자를 위해 400만원에 샀다”고 설명한 땅이다. 그런데 이 땅을 산 사흘 뒤인 8월4일 언론에 일제히 대법원, 검찰청 등 11개 사법기관을 서초동으로 이전한다는 발표가 나온다. 당시 김 후보자는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였다. 김 후보자의 매입을 그저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땅의 시세가 60억원이 넘는다니, 김 후보자는 1500배 이상 수익을 올린 셈이다. 이 정도면 시쳇말로 ‘투기 끝판왕’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김 후보자는 이 땅을 친구에게 매입한 뒤 91년 두 아들 명의로 등기를 했다는 보도로 거짓말 의혹까지 샀다.
황 작가는 내게 <강남몽>을 선물하며 책갈피에 ‘이웃과 함께 꿈꾸는 일상이 되시길’이라고 서명했다. <강남몽>은 권력과 정보를 이용한 땅 투기로 이웃의 꿈을 빼앗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 중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큰 사람이 별다른 검증 없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고, 특별한 죄의식 없이 자리를 수락하는 나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끔찍하다.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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