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30 19:05
수정 : 2013.05.3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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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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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 정상의 동선을 보면 그 나라의 의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새 지도자의 첫 정상외교는 그 정권이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를 간파할 수 있는 좋은 창구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달 초 가장 먼저 미국을 방문했다. 중국을 먼저 가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한반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결국 미국을 택했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고강도 도발에 우리 외교의 기축인 ‘한-미 동맹’ 우선이라는 현실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미국에서 돌아와 중국 방문을 준비하는 사이, ‘동북아 체스판’ 위의 말들이 갑자기 바빠졌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각국의 외교전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체스판 위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새롭게 전략을 가다듬어야 할 상황이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동향은 6월7~8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세기적 만남이다. 장소는 특이하게도 캘리포니아 휴양지인 서니랜드다.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하자는 뜻일 것이다. 세계정세의 주요 흐름을 결정할 이번 만남은 한반도 문제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줄 게 확실하다. 이번 회담의 한반도 상황은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2011년 1월의 오바마-후진타오 정상회담과 매우 흡사하다. 당시 두 정상은 남북 긴장 해결을 위한 대화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이것이 북한의 남북 군사회담 제의와 2012년 북-미 2·29 합의로 이어진 바 있다.
박 대통령 외교전략의 백미로 기대됐던 6월말 중국 방문은 그 전에 미-중 회담이 끼어들면서 김이 빠지게 됐다. 박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직접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평화구상을 설명하고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박-시 회담은 우리의 생각을 중국에 주입하기보다 미-중 회담 결과를 설명 듣는 게 주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부랴부랴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특사로 보내 시 주석에게 친서를 전달한 것도 미-중, 한-중 회담에 앞서 중국에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겠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동북아 판이 크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일본도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본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박 대통령의 냉담한 태도에 토라진 아베 신조 총리는 박 대통령의 방미 이후 이지마 이사오 내각관방 참여를 북한에 특사로 보냈다. 북한과의 독자외교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 다리를 걸쳐놓으면서 우리나라와 중국을 동시에 견제하겠다는 속내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12월 집권 이후 베트남·타이·인도네시아(1.16~18)를 시작으로 미국(2.21~23)→몽골(3.30~31)→러시아·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터키(4.30~5.4)→미얀마(5.25~26)를 정력적으로 순방했다. ‘중국 견제’가 도드라지는 행보다.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귀환 정책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활발한 정상외교를 펼치고 있다.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된 뒤 가장 먼저 찾은 나라가 러시아이고, 리커창이 총리로서 가장 먼저 찾은 나라가 인도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러시아·인도와의 협력을 통해 미-일의 포위망을 돌파하겠다는 강한 뜻이 엿보인다.
아무리 21세기라고 하지만 국가 간의 이해와 전략이 각축하는 냉엄한 현실은 변함이 없다. 유동적인 정세 속의 동북아는 더욱 그렇다. 동북아 체스판은 독자성을 갖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거대한 체스판’의 일부로 작동한다. 이런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을 잘 파악한 위에서 주체성과 창조성을 발휘해야 살 수 있는 게 우리의 운명이다. 페이스북 @ohtak5
오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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