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8 19:16
수정 : 2013.06.1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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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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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짜리 지폐가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고 한다. 돈 있는 사람들이 현금다발로 인출해 유통량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5만원권으로 15억원이 들어가는 금고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한다. 온도와 습도 조절이 가능한 김치냉장고가 현찰을 집에 보관하는 데 제격이라는 노하우가 부자들 사이에서 나돈다는 얘기도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에 겁을 먹고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금쪽같은 이자를 포기하는 이런 전주들은 국세청이 털면 털리는 개인사업자가 대부분이다. 정작 큰손들은 차명계좌라는 안전한 도피처에 깊숙이 머물러 있다. 씨제이 비자금, 전두환 비자금, 라응찬 비자금의 공통점은 차명계좌다.
일반인이야 굳이 남의 이름으로 된 계좌로 금융거래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기업 소유주나 고액 자산가, 범죄집단은 사정이 다르다. 비자금을 숨기고 돈세탁을 하고 변칙 상속·증여를 하려면 차명계좌라는 통로가 절실히 필요하다. 명의 대여자와의 관계가 확실하다면 이보다 더 안전하게 돈을 숨길 곳이 없다. 특히 은행이 제 발로 장기 휴면계좌 등을 활용해 이들의 자산을 운용해줄 경우 내부고발 없이는 검은돈의 실체가 드러나기 힘들다.
20년 전인 1993년 한여름에 전격 도입된 금융실명제는 차명계좌를 허용하고 있다. 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한다는 명목으로 허명과 가명을 없애는 쪽에만 집중했다. 금융실명제 도입은 당시 대통령의 황태자 아들도 돈뭉치를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댈 정도로 충격이었지만, 곧 부유층은 비자금과 탈세의 우회로를 찾아냈다. 금융실명제는 실명확인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차명계좌 거래를 유도하는 금융회사 임직원에 대해서만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리도록 하고 있다. 합의에 의한 차명계좌는 허용해 반쪽짜리에 그친 것이다. 국내총생산의 23%(290조원)에 이른다는 지하경제에 은신처를 마련해준 셈이다.
비자금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금융실명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회사뿐 아니라 고객에게도 실명거래를 의무화하고, 차명거래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국은 합의 차명에 규제를 가하면 금융거래를 위축시킬 수 있고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았다. 지금도 차명계좌 자체를 없애는 것보다 차명계좌를 이용한 불법행위에 대해 관리감독을 강화한다는 쪽이다. 도둑이 판을 치는데도 시민들이 놀랄까봐 출동은 자제하고 검문소 경비를 강화하겠다는 격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전재용씨처럼 노숙인 명의의 계좌를 다급하게 트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차명계좌는 부하직원이나 친인척처럼 권력관계와 친분관계를 이용해 만들게 된다. 실소유주와 명의자, 금융회사가 크게 틀어지지 않고 상호 이익이 되는 한 이들의 담합구조가 깨지기 어렵다. 비자금의 은신처를 없애려면 이러한 담합구조를 깨야 한다.
부동산실명제법의 원리를 차용해 금융자산을 차명인의 증여의제로 간주하는 민주당 민병두 의원의 법안은 주목할 만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전직 기사처럼 이름을 빌려준 통장에 30억원이 들어 있을 경우 지금은 일단 내 권리로 인정되지만 실소유주가 입증을 하면 돌려줘야 한다.
이 법은 내 통장의 돈은 과징금을 내고 나면 내 돈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정한 유예기간 뒤의 일이다. 원소유주는 차명인에게 돈을 떼일 위험이 있으므로 합의에 의한 차명이 확 줄어든다. 차명계좌의 햇볕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지하경제 양성화 방안이다. 여기에 끝내 반대할 사람은 차명계좌를 숨통으로 여기는 극소수 부유층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은 공익의 침해자이기도 하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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