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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20 19:05 수정 : 2013.06.20 19:05

오태규 논설위원

다나카 마키코는 1970년대 일본 정치를 쥐락펴락하다가 록히드 뇌물 사건으로 정치생명을 잃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외동딸이다. 그가 친미 성향이 강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외상일 때 벌어진 일이다. 2001년 미국에서 정권을 잡은 아들 부시 대통령이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을 일본에 특사로 보냈다. 아미티지는 비록 부장관이지만 21세기의 미-일 관계는 20세기의 미-영 관계를 능가할 정도로 중시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미-일 동맹파의 거두다. 하지만 촌철살인의 언변과 파격적인 행동으로 유명한 다나카 마키코는 아미티지의 면담 요구를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일본 국민은 후련하다고 환호했지만 외무성은 발칵 뒤집혔다. 형식적 의전을 내세우다가 일본 외교의 기축인 미-일 관계를 망쳤다고 개탄했다.

“당초 판문점 실무접촉의 남측 수석대표는 배광복 통일부 회담기획부장(국장급)이었으나 접촉을 하루 앞둔 8일 실장급(1급)으로 격상됐다. 배 부장도 남북회담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지만 대표의 격을 높이라는 청와대 지시로 급히 변경된 것으로 전해졌다.”(<동아일보> 6월10일치 3면) 통일부는 9일 열린 장관급 회담 실무접촉 우리 쪽 수석대표로 북한 쪽 수석대표인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의 격에 맞춰 배 국장을 내보내려 했으나 청와대의 입김으로 한 급 높은 천해성 통일정책실장으로 교체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본회담은 거꾸로 우리가 수석대표의 격을 문제 삼는 바람에 파탄 났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은 12일 남북 장관급 회담 결렬이 확정된 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소개했다. 회담 무산 이유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있고, 앞으로 형식을 맞추지 않고는 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뜻을 대변한 것일 게다. 하지만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은 진리가 아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니,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이번에 장관급 회담이 성사됐으면 6년 만에 열리는 22번째 회담이었다. 앞서 21번의 회담이 열리는 동안 수석대표의 격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동안 하지 않던 치수 조정을 무리하게 감행하다가 바둑판을 뒤엎은 꼴이다. 국내에선 많은 사람이 북한에 오래간만에 할 소리를 했다고 환호할지 모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선후도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일이다. 물론 격에 문제가 있다면 조정해야 옳다. 다만, 격이 내용을 압도할 정도로 훨씬 중요하다는 판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의문이다. 우선 이번 회담은 시기적으로 미-중 회담과 한-중 정상회담 사이에 잡혔다. 남북관계를 잘 진전시켜 미국과 중국에 휘둘리지 않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우리가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넓힐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관광 재개,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의제는 격을 앞세워 내칠 만큼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공자는 <논어> 옹야편에서 “문(형식)보다 질(내용)이 나으면 촌스럽고, 문이 질보다 나으면 사치스럽다. 문과 질이 잘 조화돼야만 군자라 할 만하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고 설파했다. 박 정권은 남북 장관급 회담의 무산이, 장기적이고 민족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사안을 단기적인 국내정치적 고려만 앞세워 밀어붙인 데서 기인한 참사가 아닌지 되돌아보기 바란다. 형식을 앞세워 국익이 얼마나 증진됐는지도 함께 돌아보시라. 페이스북 @ohtak5

오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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