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7.09 19:33 수정 : 2013.07.10 11:47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기념사진 촬영에 앞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봉규 기자

정보기관 수장은 움직임조차 ‘고급 정보’
대화록 공개 돌출행동 국가 신뢰 무너뜨려

[아침햇발] 1994년 1월20일 <한겨레신문> 1면 오른쪽 상단에는 ‘서울에 나타난 미 중앙정보국장’이란 제목의 긴장감 넘치는 사진이 실렸다. 이정우 사진부 기자가 국방부를 비밀 방문한 제임스 울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모습을 특종 보도한 것이다. 당시 한겨레는 울시 국장이 국방부에 나타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두 명의 사진기자를 내보냈다. 한 명은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해 사진을 찍지도 못했고, 주차장 차량 사이에 숨어 있던 이 기자가 촬영에 성공했다. 그도 쉽게 찍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셔터를 누르자, 예민한 청각의 경호원들이 금세 달려왔다. 그가 이 짧은 시간에 이미 찍은 필름을 사진기에서 꺼내 운전기사에게 맡기고 새 필름으로 갈아끼우는 민첩성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미 중앙정보국장이 해외 비밀 방문 중에 노출된 희대의 사진은 태어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국은 당시 1차 북핵 위기와 관련해 북폭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1994년 1월19 한국을 방문한 제임스 울시 미국 중앙정보국장(가운데 트렌치코트를 입은 이)이 19일 오후 국방부 청사에 들어서고 있다. 이날 울시 국장 경호에 나선 두 나라 정보요원들은 이를 취재하던 < 한겨레 > 기자들을 양쪽에서 붙잡고 필름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등 한때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1998년 4월3일 우리나라 거의 모든 신문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 김 대통령과 주룽지 중국 총리의 회담 내용이 ‘한-일 정상 대화록’, ‘한-중 정상 대화록’이란 제목 아래 실렸다. 김 대통령의 집권 뒤 정상외교 데뷔 무대인 런던 아시아유럽정상회의(아셈)에 수행했던 ‘실세’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현 민주당 의원)이 동석했던 모든 정상회담의 내용을 대화록 형태로 브리핑한 데 따른 것이다. 박 의원은 당시 이런 식의 브리핑에 대해 아무런 지적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그때가 한국 외교 사상 비공개 정상회담 대화록이 발췌 수준에서나마 공개된 처음이자 마지막 경우였다. (물론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이번에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기 전까지)

앞의 사례가 정보기관 수장의 움직임조차 얼마나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면, 뒤의 예는 정상 사이의 비공개 대화는 아무리 하찮은 내용이라도 함부로 공개해선 안 되는 ‘민감 품목’임을 말해준다.

남 원장이 국정원에 대한 최초의 국회 국정조사를 앞두고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공개했다. 그는 이것을 까발리면서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참으로 수준 낮고 어리석은 언행이다. 무엇보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의 평가가 통렬하다. 이 신문은 지난달 26일치 ‘한국에선 정보기관이 누설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보기관의 임무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지 폭로가 아닌데 한국에서는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기밀문서로 분류된 대화록을 공개해 정치적 대립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보도했다.
오태규 논설위원

결국 그의 돌출행동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는커녕 국가의 신뢰를 통째로 무너뜨렸다. 몇 나라의 대사를 지낸 한 퇴직 외교관은 “문명국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 어느 나라가 우리를 믿고 속에 있는 얘기를 하겠느냐”고 개탄했다. 원세훈 전 원장은 댓글 공작으로 선거에 개입해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었고, 남 원장은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라는 자살폭탄으로 나라를 내파시켰다.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는 나 죽어 나라를 구한다는 숭고함이라도 있었지만, 그는 나 살자고 나라의 신뢰를 거덜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오랜 침묵을 깨고 국정원의 개혁방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국정원은 거듭나야 하고, 스스로 개혁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인책 대상자에게 알아서 개혁을 하도록 맡기겠다는 얘기인데, 사태의 심각성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오태규 논설위원 페이스북 @ohtak5

메이드인 국정원, 몸통을 밝혀라(시사게이트#3)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아침햇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