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정치의 추락이 끝이 없다. 이석기 의원 사건은 진보 정치의 막장이라 할 만하다. 지난해 통합진보당 경선부정 사태 때 바닥을 드러내더니 이젠 아예 그 구차한 모습을 온 세상에 알리고 말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국가정보원이 흘렸다는 녹취록에서 이 의원은 경선부정 사태를 이렇게 규정했다. ‘가장 위대한 진보세력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고 장기집권을 관철하려는 미 제국주의 세력의 음모다.’ 나만 옳다는 독선, 미국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제국주의 환원론, 불리하면 내놓는 음모론 등 하나같이 구시대적이다. 녹취록은 화석화된 시대착오적 진보의 해악으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이 의원이 유죄란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의원은 법정에서 무죄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 법정은 다르다. 애초부터 무리해 보이는 내란음모나 선동,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를 들이대 이 의원의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국회의원과 정당의 경우는 다르다. 국민 앞에 정치적 견해와 정책을 투명하게 제시하고 표로 심판받아야 한다.
변종 세습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는 식의 사고방식은 국민 눈높이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핵개발을 찬양하는 식의 대북정책을 지지해서 국민이 총선 때 220만표를 준 건 아니다. 이 의원과 진보당은 실정법이 아니라 국민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한때 투표소에 들어가 진보정당을 안 찍고 나오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던 때가 있었다. 풍찬노숙하며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이들을 돕지 못했다는 부채의식 같은 것이었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확보하며 원내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런 마음들이 한데 모인 것이었다. 그런 연민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의원 사건은 파탄 난 진보 정당 노선의 상징과도 같다. 지금처럼 진보 정치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적이 없다. 어디 하나 희망을 찾기 어렵다. 이석기 그룹에만 돌을 던질 일도 아니다. 민주당 내 개혁 인사들, 한때 당을 같이 했던 진보 정치인들 역시 책임이 있다. 이들에게 진보를 떠넘긴 채 나 몰라라 했거나, 알면서도 방치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이후 13년 세월이 흐른 지금 진보 정치는 다시 원점에 섰다. 새로운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의당 일각에서 북유럽형 사회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사회민주당으로 개명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현실화하지 못했다. 원외 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은 생태주의적 접근 등으로 활로를 찾고 있지만 아직 대중정당의 면모를 갖춘 것 같진 않다.
진보 정치가 필요한 이유는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보수는 기존의 가치와 제도를 잘 지키려 노력한다.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그 사회는 온전하지 못하다.
진보 정치를 다시 세우는 일은 지금까지보다 더 험난해 보인다. 기존 진보 정당 노선이 시효를 다한 탓이다. 흔히들 창조적 파괴를 통한 진보 정치의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재구성이라기보다는 재창조 수준의 새 주체, 새 패러다임이 필요해 보인다.
진보 정치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지금 10년, 20년을 내다보며 제2의 진보 정치 건설에 나설 때다. 부단히 새 인물을 찾고 새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싸우는 진보가 아니라 미래를 담보하는 진보가 돼야 한다. 북한 문제를 총결산하고 현실에 입각한 합리적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의 마음을 설레게 해야 한다. 국민이 진보 정당을 통해 미래를 엿볼 수 있어야 한다. 진보의 부활을 바라는 모든 이들이 이를 위해 참회하는 심정으로 견마지로를 다할 때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이석기 체포동의안 통과 이후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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