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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1.05 19:04 수정 : 2013.11.05 20:49

김의겸 논설위원

지난번 칼럼에서 `효녀 박근혜‘에 의문을 제기했다. 친일파나 독재자라는 아버지의 인상을 지우기는 커녕 더 선명한 색채를 입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효는 국방 분야에서도 일어난다.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내건 동기는 미국에 대한 서운함에서 비롯된다. 김신조 일당이 자신의 목을 따러 청와대를 기습하자, 박정희는 미국에 보복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하고 만다. 그런데 불과 이틀 뒤 푸에블로호가 납치되자 미국은 엔터프라이즈호를 동해에 급파하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박정희의 씁쓸한 미소가 느껴진다.

개인적 섭섭함은 닉슨 독트린 이후 국가 정책으로 발전한다. 자립경제, 자주국방의 깃발을 내걸고 `무기 국산화’ 정책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다. 선진국에서 공부하던 두뇌들을 끌어모아 국방과학연구소를 세우고, 국산 유도탄과 핵 개발에 나선다. 집권 연장책 등 여러 비판이 제기될 수 있지만, 최소한 `탈 외세‘를 지향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 무렵 박정희의 일기 한 대목이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엄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았다.”

딸의 시대에도 국제 정세는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아버지 때는 미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던 데탕트 시대였다. 자주국방은 `변심한’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동력이었다. 지금은 거꾸로 미-중 사이가 멀어지면서, 우리가 억지로 불구덩이에 끌려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피어오르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힘 빠지고 돈 떨어지자, 일본을 앞세우고 있다. 신이 난 일본은 당장이라도 중국과 한판 붙어보겠다는 기세다.

두 세력이 싸우면 곤죽이 되는 건 한반도다. 120년 전 청일 전쟁은 인천 앞 바다에서 시작해 아산, 성환, 평양 전투로 이어졌다. 60년 전 6·25도 맥아더와 펑더화이의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주전은 미-중이었다. 60년 주기로 비슷한 구도가 다시 짜이고 있는 거다. 요즘 중국 잡지들에는 남중국해를 배경으로 한 중일 전쟁 가상 시나리오가 실리고 있다. 미·일과 한데 엮인 우리의 경우, 억지춘향일지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에서 군함을 출동시켜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중국 전투기가 강정마을을 폭격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하지만 딸은 자주국방의 길을 걸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다시 연기해달라고 요청하는 등 미국에 더 매달리는 모양새다. 작전권을 다른 나라에 맡긴 건 지구 상에서 우리가 유일하다. 저자세로 나가니 미국은 한 술 더 뜬다. “정 그렇게 아쉬우면 미사일방어체제(MD)에 들어와”라고. 이젠 고작 몇 년 전작권 환수를 늦추자고 미국 엠디 체제 아래서 10조원이 넘게 들어갈, 중고도니 고고도니 하는 요격미사일을 구입해야 할 판이다. 핵미사일을 가진 중국의 콧털을 건드는 격이니, 돈은 돈대로 쓰고 안보는 더 불안해진다. 무덤 속 박정희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내가 자주국방을 외친 지 40년이 넘었고, 군인 대통령이 32년을 통치했는데 아직도 자주국방을 못 했단 말인가.”

박정희의 자주국방 정신은 차라리 노무현이 이어받았다. 코가 꿰어 전쟁에 동원되는 걸 막으려고 미리미리 전작권을 넘겨받으려 했고, 군국주의자라는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국방비를 대폭 증액했다.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한 축사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시아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으며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원칙이다.” 박근혜는 노무현을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다. 그런 노무현에게 아버지의 자주국방 정신을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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