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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1.19 18:52 수정 : 2013.11.19 18:52

정영무 논설위원

대리석을 깎는 석공 세 사람이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첫번째 사람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죽지 못해 이 일을 한다고 했고, 두번째 사람은 담담하게 돈을 벌려고 한다고 했다. 평화로운 표정의 세번째 사람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성당을 짓는다고 했다.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고 즐겁게 일한 석공의 삶은 남달랐을 것이다.

창을 통해 세상을 보듯 우리도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 본다. 어떤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삶으로부터 얻어내는 결과물도 달라진다. 세번째 석공은 의미 중심의 프레임으로 사물을 대했다. 심리학자 최인철 서울대 교수는 의미 중심의 프레임 다음으로 자기방어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 다가서는 접근의 프레임을 갖는 게 지혜로운 자세라고 한다. 지금 여기의 프레임으로 현재에 충실하라는 것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만일 위기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면 위기의 초입이거나, 위기가 진행중이거나, 위기의 끝 가운데 한 곳에 서 있는 게 된다.

정치는 억울함을 최소화해주는 것이다. 국민행복시대라는 지금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차고 넘친다. 공안몰이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이 그렇고 자본권력의 제물이 된 사람들이 그렇다. 밀양의 촌로들은 몸을 던져 항거하고 김학의 사건 피해자라는 여성은 청와대에 절절한 탄원서를 보냈다. 신문고가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북소리가 두둥 울려 퍼질 법하다. 모든 지역과 성별, 세대의 사람들을 고루 등용하고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다짐은 온데간데없다. 갈등은 심해지고 사람들의 불안 불만은 높아졌다. 누가 더 억울하고 억울할 자격이 있으며 억울함의 총량은 얼마나 증가할 것인지 억울함의 프레임이 제격일 성싶다.

사람 살아가는 데 억울한 일이 없을 수 없겠지만 사회적인 억울함은 질서가 정의에 우선할 때 커진다. 마키아벨리는 혼란한 정의사회보다 질서있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낫다고 했지만, 정의로운 사회가 혼란할 리 없다. 질서가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정의 요구가 짓눌린다. 여기에 더해 법 집행이 공정하지 않고 약자에게만 추상같을 때 억울함은 배가된다.

한 마리의 해충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인다는 종북 프레임은 억울함을 낳는 원천이 되고 있다. 사람이 해충일 리 없는데 해충으로 몰아야 하기 때문에 누명을 씌우고 진실을 말한 사람은 눈엣가시 취급을 한다. 무지막지한 자본권력 앞에서 시늉만 낸 경제민주화 또한 억울함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한다. 대기업의 외피를 쓴 하청노동자는 전태일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생을 내려놓았다. 1인시위라도 해서 예산을 더 따내야 할 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재정을 걱정하니 노인들은 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억울함은 청와대까지 뻗쳐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승지도 억울함을 토로하는 판이다. 그는 고향이 자신이나 국무총리와 거기서 거기인 검찰총장 내정자와의 친분설에 대해 별 사이가 아니라며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지난여름에도 무척 억울해한 적이 있다.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된다”는 적나라한 지역감정 선동의 치부를 연출한 초원복집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나 백수 상태였는데도 ‘장관이라고 오보가 나갔다. 억울하다’고 했다.

사람의 품격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함에서 나온다. 나라의 품격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절절한 억울함을 살펴야 할 권력자가 옷에 티끌 하나 묻은 정도의 일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막힌 현실이 나로선 턱없이 억울하다. 그는 억울할 권리가 없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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