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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26 18:24 수정 : 2015.03.27 10:47

마리화나 합법화를 주장하는 전직 대법관이 있다. 2010년 미국 연방대법원을 퇴임한 존 폴 스티븐스 전 대법관이다. 미국인의 58%가 같은 생각이라는데, 그래도 대법관 출신이 그리 말하니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설파하는 주제 가운데 마리화나는 사소한 일부일 뿐이다. 선거자금 제한, 총기 규제, 사형제 폐지 등 첨예한 사회적 쟁점에 묵직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직에서 판결할 때는 사형제 합헌 쪽에 섰다. 신념보다 실정법에 근거해 판결해야 하는 법관 직분에 충실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아 지난해 책을 펴냈다. 퇴임 뒤 두번째 저서다. 올해 그의 나이 95살! 평생 재판으로 쌓은 경험과 지혜를 응축시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쏟아붓는 노법률가의 열정에 미국 사회는 존경을 보낸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제라고 하지만, 스스로 물러나 여생을 하급법원에서 일하며 보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메이저리그 출신이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건 재미없다”며 꺼리는 이들도 있다지만, 하급법원행을 택한 대법관이 지금까지 11명에 이른다. 때로는 자신의 판결이 대법원에 올라가 옛 동료들에 의해 파기당하는 수모(?)도 겪지만, 재판을 소명으로 여긴다면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책도 쓰고 다양한 사회공헌활동도 한다.

우리에게도 공익활동에 전념하는 전수안 전 대법관이나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여러 전직 대법관이 있다. 하지만 퇴임 대법관의 주된 이미지는 여전히 변호사로 변신한 전관이다. 이런 이들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고 살아야 하다니 무섭기마저 하다. 대법관이 어떤 자리인가. 우리의 삶과 죽음, 사랑까지도 좌우하는 자리다. 여중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1·2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40대에게 ‘그것은 사랑이었다’며 무죄를 선고할 수 있는 게 대법관이다. 말 그대로의 죽음인 사형을 확정짓는 것도 대법관이다. 내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임금은 어디까지 받을 수 있는지도 대법관이 판단하며, 전 재산이 걸린 소송의 최후 심판자도 대법관이다. 이 무서운 권한을 행사하는 대법관이 퇴임 뒤 사사로운 돈벌이에나 뛰어들 위인이라면, 더구나 그 동료였던 전직 대법관들이 금권의 편에 서서 변호사로 떼돈을 버는 상황이라면, 어떤 경외와 신뢰로 우리의 운명을 그의 판결에 맡길 수 있겠는가.

대법관을 마쳐도 50대의 이른 나이인 경우가 있는데 경제활동을 아예 막을 수는 없지 않으냐는 논리로 변호사 개업을 옹호하기도 한다. 직업선택의 자유도 들먹인다. 그러나 그 경제활동이 꼭 변호사 개업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른 나이라면 그만큼 다른 의미있는 일을 시작할 기회가 더 열려 있는 셈이다. 미국처럼 하급법원에서 계속 일하는 방법도 있다.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은 “법관이란 자리는 법률가 인생의 정점인 갓돌이 돼야 한다. 많은 돈을 버는 자리로 나가기 위한 디딤돌이 된다면 진정한 사법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저 헌법적 가치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박용현 논설위원
헌법에 규정된 대법관 연임제도 대안이다. 이른 나이에 퇴임해 변호사 개업밖에 할 일이 없다면 대법관을 더 오래 하면 된다. 애초 그럴 만한 능력과 사명감을 갖춘 인물을 신중히 선출하면 된다. 대법원은 왜 그런 발상조차 하지 않을까. 자격 불문하고 골고루 나눠먹어야 하는 자리라서 그런 건가. 박상옥 후보자처럼 자격 없는 인물까지 굳이 대법관에 앉히려 드는 걸 보면 괜한 의심은 아닌 듯싶다. 그게 현실이니, 아무나 대법관 되시고 퇴임하면 돈 많이 벌어 재벌 되시라고 해야 하나. 두려움과 절망이 너무 깊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관련 영상] 법조예능 <불타는 감자>, 대법관 전관예우 감상법(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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