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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1.26 18:52 수정 : 2016.01.26 20:52

지난 주말 막을 내린 2016년 다보스포럼의 화두는 ‘4차 산업혁명’이었다. 자본주의 문명이 증기력을 활용한 기계화(1차)와 전력 기반의 대량생산(2차), 전자·정보통신 기술에 기댄 자동화(3차) 단계를 차례로 지나 이제 융합기술이 꽃피울 새로운 시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는 게 뼈대다. 몇 년 안에 주요 나라에서 일자리 500만개쯤은 가뿐히 사라진다니, 나와 20대 초반 아들의 삶도 격랑에 휩싸이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다만 내로라하는 거물급 비즈니스맨들의 사교 모임이라고는 하나, 공급자(기업)의 시야에 너무 갇힌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단지 생산기술과 생산방식의 혁신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기에 하는 얘기다. 단적으로 생산력(공급)과 구매력(수요)이라는 두 바퀴가 짝패처럼 단단히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 한, 제아무리 사물인터넷으로 무장하고 양자컴퓨터가 주름잡는다 한들 그 사회, 그 시대는 모래성에 그치기 십상이다.

과거의 경험이 말해준다. 새로운 기술혁명이 활짝 열어준 삶의 풍요로움만큼이나, 앞서가는 생산력과 뒤처진 구매력이 빚는 근원적 갈등은 운명처럼 사람들 곁을 좀체 떠나지 않았다. 비참한 공장노동과 격렬한 기계파괴 운동이 1차 산업혁명의 부산물이었다면, 다음 단계에선 정유·철강·철도·화학 등 신산업의 독점 가문이 지배하는 도금시대의 극심한 불평등이 대공황의 폭발력을 더욱 높였다. 3차 산업혁명의 도화선이라는 전자·정보기술 역시 과도한 금융 팽창의 불씨를 키워, 결국엔 금융발 새로운 위기 형태의 원죄라는 불명예를 덮어쓰지 않았나.

거듭된 위기에도 자본주의 문명이 여태껏 지탱해온 건, 위기가 붕괴로 치닫지 않도록 ‘해법’을 계속 찾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게다. 때론 탈출구가, 때론 타협이 해법의 메뉴로 등장했으나, 생산력과 구매력의 ‘동행’이란 점에선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상 영국의 솔로 무대였던 1차 산업혁명은 제쳐둔다 치자. 후발 산업화 경쟁과 맞물린 2차 산업혁명 단계의 갈등은 제국주의(공간의 확장)라는 일시적 탈출구와 복지제도라는 타협 카드 없이는 결코 봉합될 수 없었다. 세번째 단계는 더욱 극적이다. 공간을 지구 바깥(우주항공 개발 등)으로 확장하거나 문화자본을 앞장세워 인간 내면으로 침투하기도 했고, 가계부채라는 요술방망이로 미래 소득을 끌어다 쓰는 시간의 팽창술마저 선보였다.

자, 4차 산업혁명 차례다. 분명 멋진 신세계다. 기업 입장에선 생산·수송·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게다가 로봇이라는 ‘고분고분한 노동자’마저 맘껏 부릴 수 있지 않나.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제 누가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까, 아니 구매할 수 있을까? 지구상에 자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순수한 공간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현재 소득의 증가 없이 미래 소득을 무한정 끌어다 쓰기엔 가계의 체력도 바닥났다. 유일한 해법은 모자라는 구매력을 벌충할 타협뿐이란 얘기인데, 과연 기업이 ‘일자리 없는’ 인간 대신 로봇한테 월급이라도 쥐여주는 날이 찾아올까? 선택은 그들 몫이다.

최우성 논설위원
올해 다보스포럼에도 50여명의 국내 재계 인사들이 수억원씩 내고 참가했다. 정권의 핵심 실세라는 전직 경제부총리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다녀왔다. 우리 사회를 구매력 붕괴라는 막다른 종착점으로 자꾸 내모는 장본인은 제 무덤 파는 얼빠진 자본과 장단 맞추는 무개념 국가다. 인공지능(AI)이 새 세상을 열리라는 전망이 넘친다. 맞는 말이다. 다만 한가지 전제가 있다. 자본의 지능, 국가의 지능부터 먼저 되찾고 볼 일이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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