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7.11 17:50
수정 : 2017.07.11 19:01
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대법원장은 ‘치프 저스티스 오브 더 슈프림 코트’(Chief Justice of the Supreme Court)로 표기한다. 수석재판관이나 법원장으로도 번역되는 ‘치프 저스티스’의 구실은 작지 않다. 17세기 초 영국 보통법 법원의 법원장과 왕실법원 수석판사(대법관)를 지낸 에드워드 쿡은 사법 독립을 상징하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제임스 1세가 법정용 가발과 법복을 빌려달라고 하자, 코크는 “왕이라도 법관은 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국왕이 당사자인 사건에선 국왕의 연기 요구를 거부하고 패소로 판결했다.
보통법 법원장 때는 왕립의사협회에 독점적 길드 권력을 준 의회제정법이 보통법에 반해 무효라고 판결했다.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는 없다’고 선언한 이 판결은 근대사법의 대전제인 ‘적법절차’ 원칙의 원천으로 평가된다.
우리에게도 기억해야 할 ‘치프 저스티스’가 있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거듭되는 재판 간섭에 꼬장꼬장하게 맞서 정부 수립 전후 취약했던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냈다.
그가 쌓은 사법 독립의 초석은 정치권력의 압박에 금세 흐트러졌다. 1958년 2대 대법원장 취임 이후 법원은 친정부 성향으로 치달았다. 진보당 사건 판결이 대표적이다. ‘사법의 암흑기’는 오래갔다. 검찰 공소장을 그대로 따 붙인 정찰제 판결이 이어졌다. 대법원판사회의가 행사하던 인사 등 사법행정권도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넘겨지더니, 1972년 유신헌법부터는 대법원장에게 그대로 집중됐다. 내부 독재화하기 쉬운 1인 집중구조에선 한 사람만 지배하면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정치권력의 사법부 통제에 가장 유용한 제도다(이헌환, ‘대법원장의 지위와 사법행정권’).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폭압적인 정치권력 앞에서는 헌법도 소용없고 법치주의도 소용없다는 걸 내 눈으로 봤다”는 그 시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금도 판결은 권력의 바람에 흔들린다.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봤지만,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겐 국가배상 책임이 없다고 뒤집었다. 과거사 사건의 국가배상 소멸시효를 6개월로 줄이고,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핵심 증거를 별 이유 없이 배척한 것도 지금의 대법원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대법원장 1인에게 집중된 사법권력이 외압의 보호벽이 되기는커녕 법관의 독립을 해치는 내부 통제장치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이미 무성하다. 인사 등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하거나 없애야 한다는 논의는 그 연장이다. 70년 넘게 이어져온 엘리트 법관들의 폐쇄적 ‘관료 사법’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변호사 등 경력자들로 법관을 뽑는 법조일원화에선 당연한 주문이다.
다음 ‘치프 저스티스’ 대법원장은 그런 기념비적 전환을 이끌 사람이어야 한다. 변화를 받아들여 사법체계를 발전시킬 시야와 안목이 우선이다. 헌법을 바꾸지 않고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개혁을 주도하는 추진력도 중요하다. 고위법관 출신이 기존의 관행에 익숙해 문제의식조차 없다면, 법대 아래에서 기존 체제의 문제를 오래 겪고 느낀 변호사 출신도 기용 못 할 바 아니다. 지금은 지역이나 성별, 경력 등 ‘스펙’만으로 대법원장을 임명해 상징 효과를 노릴 때가 아니다.
대법원장 임기 만료가 9월24일이니, 늦어도 8월 초·중순까지는 후임이 지명돼야 한다. 그때까지 눈과 귀를 다 동원해 적임자를 찾는 것이 임명권자만의 일은 아닐 터이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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