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10 17:28
수정 : 2017.10.10 19:04
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대법관은 취임식 하루만 좋고 6년 내내 죽을 고생만 한다고 한다.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법원에는 본안 사건만 4만3694건이 접수됐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뺀 대법관 12명이 각자 주중 하루 14건꼴로, 월 303건씩 처리해야 한다. 대법원까지 오면서 커질 대로 커진 사건기록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 어물어물하다가는 일에 치이게 된다.
한 전직 대법관은 자신이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취임할 즈음, 주변 후배들은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큰 사건을 골라 대법원의 분위기를 바꿔달라고 주문했다. 여러 자리에서 그런 조언을 듣는 동안, 집무실의 기록 보따리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전임자가 남긴 사건 위에 새 사건이 쌓이면서 사건 처리율은 현격한 꼴찌로 떨어졌다. 추궁은 없었지만, 눈치를 보지 않을 순 없다. 맡은 사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처지에선 소부 합의든 전원합의체든 ‘말발’이 서지 않는다. 주말을 반납하고 죽어라고 ‘사건 떼기’에 나섰다. 간신히 처리율 하위권을 벗어나니 어느새 임기가 한참 지나 있었다. 애초 꿈꿨던 법원 개혁은커녕 후일을 위한 소수의견 남기기에도 힘겨웠던 그 시절엔 그런 사정이 있었다.
일상은 종종 발목을 잡는다. 포부와 함께 부임했던 비관료 출신 장관들은 ‘꼭 참석해야 한다’는 행사와 ‘그렇게 해왔다’는 일에 끌려다니다 그만 이임식을 맞는다. 대법원에선 사건의 홍수에 길을 잃는다. 전임자가 캐비닛에 처박아둔 복잡한 사건들을 ‘떼다’ 지친 한 대법관은 임기 중반에 벌써 “번아웃”(탈진)을 호소했다. 일 잘한다는 이였는데도 그랬다. 그런 마당엔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를 이룰 참신한 이를 대법관으로 투입하더라도 자칫 ‘한강에 돌 던지기’가 될 수 있다.
상고허가제든 대법관 증원이든 상고심의 과부하를 줄이는 일을 다른 사법개혁 과제의 뒤에 놓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론의 환호가 따르지 않더라도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
성가신 일이 그것뿐이겠는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문제가 종국엔 일 전체를 어그러뜨리는 경우는 많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대표적이다. 로스쿨 졸업생이 치르는 변호사시험 합격률은 2012년 1회 시험부터 로스쿨 입학정원 2천명의 75%로 돼 있다. 로스쿨 교육을 정상화하려면 변시가 자격시험이 되어야 한다거나, 합격률 기준이라도 입학정원이 아닌 응시자 수로 해야 한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있었다. 이를 무시한 결과가 대다수 로스쿨의 ‘변시 학원’ 전락이다. 유치 경쟁 탓에 한 시·도에 두 개씩, 40명 혹은 50명의 소규모 로스쿨을 양산한 결과도 참담하다. 애초 표방한 특성화 교육은 진작에 실종됐다. 규모의 경제 때문에라도 그런 소규모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생 성적의 상대평가제 강화도 특성화·전문화의 실종을 재촉하고 로스쿨 교육의 퇴행을 불러왔다. 작은 제도적 장치의 파국적 영향을 살피지 못한 결과가 이렇다.
당장의 사법개혁에도 뇌관은 숱하다. 법관 인사 및 평정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법원 전체가 고인 물처럼 침체할 수 있고, 중앙집중식 통제가 되레 굳어질 수도 있다. 법률의 단서와 표현의 ‘틈새’ 사이로 개혁 취지가 새어나갔던 전철은 검찰개혁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 예컨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우선관할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는 검찰과 공수처의 위상과 관계를 좌우할 문제이니, 그저 ‘운용의 묘’에 맡길 일이 아니다. 다른 일처럼, 개혁도 디테일에 성패가 갈린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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