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30 17:53
수정 : 2017.11.30 19:30
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 처음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는 헤겔의 글에 마르크스가 덧붙인 말이라고 한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정치적 혁명은 반복되면 사람들이 승인한다”며 “반복됨으로써 처음에는 단지 우연처럼 보였던 것이 실제적이고 공인된 실체가 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의 반복’을 언급한 것도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우회적 표현’이란 해석이 있다. 역사가 두번째 반복될 때는 ‘익살극’처럼 옛 제도와 즐겁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결별한다는 뜻이겠다.
역사의 반복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국정농단에서 적폐 청산, 여야 정치인 부패까지 거침없이 이어지는 검찰 수사는 문재인 정부 첫해를 넘어 내년까지 치달을 기세다. 여론의 지지도 높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끊고 권력 남용과 정치공작 따위 불법의 관행을 뿌리 뽑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과제다.
14년 전에도 이랬다. 참여정부 첫해인 2003년부터 이듬해까지 검찰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국민의 큰 성원을 받았다. 수사를 지휘한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정치개혁 과제를 이끌어낸 ‘국민검사’로 인기를 끌었다.
닮은 점은 또 있다. 이번 수사에서 청와대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조국 민정수석은 처음부터 수사 지휘를 않겠다고 밝혔고, 검찰은 청와대와 법무부에 대한 사전보고를 없앴다. 청와대는 현직 정무수석 수사도 뉴스를 보고야 알았다고 한다.
2003년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 관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검찰 통제를 ‘내려놓은’ 덕에 대선자금 수사가 성공할 수 있었다. 노 대통령은 검찰을 정치권력의 입김에서 풀어주면 검찰 민주화까지 따라온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기대가 ‘순진했다’는 후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개혁 대상이던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 뒤 목소리를 높였다. 중수부 폐지론에 ‘사회개혁에 반대되는 주장’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도, 수사권 조정도 흐지부지됐다. ‘고비처, 꼭 신설해야만 하나’, ‘신중해야 할 검찰개혁 발언’ 등이 그즈음 신문 사설의 제목이다. 개혁을 모면한 검찰이 그 뒤 어떻게 돌변했는지는 모두가 목격한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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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청은 전병헌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검찰 조사가 한창이던 10월20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공수처설치법 제정 관련 당정청회의’를 열어 공수처 도입 의지를 다졌다. 오른쪽부터 조국 민정수석, 박상기 법무부 장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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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다를까. 이번에는 먼저 대대적인 검찰 인사가 있었다. 사람을 바꿔 조직을 바꾸자는 것이겠다. 검찰 수사가 한창인 동안에도 당·정·청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도입 의지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적폐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검찰개혁은 뉴스와 정치권의 구호에서 사라졌다.
개혁 작업이 제대로 추진되는지도 미심쩍다. 법무부의 공수처 법안만 해도, 기능과 위상을 축소해 검찰 견제를 어렵게 했다는 비판이 있다. 올해 안에 안을 마련해 내년부터 시행하겠다던 검·경 수사권 조정도 아직 진도가 늦다. 검찰의 존재감이 이번처럼 확연해진 뒤에도 검찰 권력의 해체가 가능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검찰의 수사 성과가 검찰개혁을 차단한 ‘역설’은 이미 있었다.
십수년 전의 일은 결국 몇년 뒤 비극으로 끝났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검찰개혁이라는 ‘역사적 필연’을 쉽게 이룰 것 같지는 않다. 적폐 수사 뒤 검찰의 칼을 거둬들이겠다는 생각부터가 순진한 것일 수 있다. 기력을 찾은 검찰이 순순히 칼을 내놓을 리 없다.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검찰의 자체개혁 주장도 막강한 권한이 그대로라면 ‘눈 가리고 아웅’이다. 지금은 개혁 주체의 현명한 준비와 단호한 행동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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