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4 19:41
수정 : 2013.09.0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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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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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박지훈의 서바이벌 대작전
어느날 누군가 슬그머니 접근해 지금 재직중인 회사의 정보 빼내 오면 다른 회사의 높은 자리와 많은 돈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의외로 흔히 벌어지는 일. 마침 경제적으로 매우 딱한 처지였다고 치면, 이거 참 고민스럽다. 늘 고용 불안정하니 평생직장이란 말 사라진 지도 이미 옛날인데 섭섭하다 못해 야속한 회사의 정보 따위 보호해 줄 까닭이 뭐겠나, 보안을 위한 직업윤리 교육 강화한다던데 열악한 대우와 상대적 박탈감부터 없애는 게 제대로 된 순서지 교육은 무슨, 윤리란 게 교육한다고 해서 막 자라고 막 커지는 것도 아닌데 등, 부지런히 자기합리화 시도해 보지만 애초에 잘못 끼운 첫 단추.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는 것이 서바이벌이니, 일단 걸리지 않는 방법을.
제대로 된 보안 시스템은 매우 훌륭히 작동한다. 접속할 수 있다고 해서 타 부서 문서 함부로 뒤지는 짓은 금물, 최신 장비는 그런 이상행동 자동 탐지해 보안 담당자에게 보고한다. 요즘 유행인 망분리 해체 시도도 마찬가지, 실시간으로 딱 걸린다. 온통 스마트한 세상, 결코 만만하지 않다. 구두 뒷굽에 유에스비 메모리 숨겨 설계도 빼돌렸다는 전설도 이미 철 지난 무용담, 출입구 검색대에서 붙잡힌다. 아주 비싼 정보 있는 곳에서는 검색대에 걸리는 특수안료를 바르니 종이 한 장도 들고나올 수 없다. 다행히 검색대가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훔치려는 그 무엇은 무가치한 물건일 확률 높으니 시작부터 쓸데없는 노력. 이쯤에서 포기할까? 아니, 궁하면 통하는 법이니 좀더 가 보자.
위장하라. 0순위 금지품 디지털카메라 및 기타 메모리 기기는 포기하라. “아날로그 감성이 좋더라고요”라며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사내 동호회를 만들어 검색대 통과 명분도 갖추고. 요즘 누가 필름 따위 신경쓰랴. 그런 게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도 많다. 접근하라. 동료의 온갖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출석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하고. 설치가 까다로운 소프트웨어의 전도사가 되라. 남의 컴퓨터에 손대도 되는 자격을 얻는 셈. 이때 예쁜 여자 또는 멋진 남자가 당신에게 다가올 수도 있는데 무조건 경계하라. 그 호감의 까닭이 과연 당신 외면이나 내면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회사가 나를 의심하는 거라고 판단하고 촬영은 과감히 포기한다. 그럼 모조리 외워버리는 수밖에. 기억력 발달 훈련을 하라. 컴퓨터 폰트를 바꾼다. 알아보기 어려워야 읽으려 애쓰며 뇌가 활발해진다. 고딕 이탤릭체가 좋다는 설이 있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운다. 오른손잡이라면 왼손을, 왼손잡이라면 오른손을 쓴다. 어떤 일이든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면 대뇌가 아니라 소뇌가 움직이니 좋지 않다. 일부러 글자나 숫자의 순서를 바꿔 보라. 비논리적인 상황을 그릴수록 기억이 더 잘된다. 뇌가 충분히 발달했다 싶으면 문서든 설계도든 통째로 외워버리는 거다. 이른바 사진적 기억, 가능한 일이다.
이대로 행한다면 당신은 스파이로서 성공할 수 있다. 실패하더라도 낭만적이고 친절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게 될 테니 승진에 매우 유리한 조건, 어쨌든 부와 명예를 노린 애초 목적은 달성하는 셈. 단, 성공하든 실패하든 절대로 들키지 말 것, 발각시 아무도 당신의 딱한 사정 따위 들어주지 않는다. 죄가 크니 벌도 무겁다.
박지훈 소프트웨어 디자이너
zeensai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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