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9 20:08
수정 : 2013.10.16 15:47
[매거진 esc] 박지훈의 서바이벌 대작전
서바이벌과 호신은 불가분의 관계, 결국 자기 몸을 지키자는 것이다. 근데 세간의 호신술, 특히 여성 호신술 커리큘럼을 보면 왠지 까마득한 느낌이다. 대개 유술계 격투기 전문가가 짠, 이미 충분히 단련된 남성 기준 기술들. 말은 쉽다. 손목 꺾어 당기세요, 손가락으로 눈을 콱 찌르세요, 잽싸게 낭심을 걷어차세요, 자! 간단하죠? 간단할 리가 있나! 그저 요즘 도장 형편이 어렵나 보다 싶을 뿐.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들 때 저항하는 여성의 위기 모면 확률은 무저항의 경우보다 훨씬 더 높다. 하지만 설득이나 협박 등 말로써 상대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힘에 힘으로 맞서 성공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완벽하게 방어한, 즉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은 경우의 저항 방법을 보면 도망 > 대화 > 비명 > 완력 차례. 그러니 수련에 수년 투자할 각오 아니라면 무력은 그리 권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호신술 책자를 보더라도 가장 믿을 만한 문장은 “적의 팔이 내 팔보다 굵으면 이미 졌다고 판단하고 즉시 달아나라”. 아마 훨씬 더 굵을 것이다. 그러니 적 노릇 하는 걸 테고.
주변 여성들에게 호루라기를 선물하곤 한다. “애걔? 이걸로 뭘?” 영 시시하다는 반응이지만 호루라기, 뜻밖에 매우 효과적인 호신도구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호루라기 분다고 누가 나서서 돕겠느냐 따지더라만, 주변에 위험을 알려 도움을 바라기보다 잠재적 범죄자가 호루라기 소리에 긴장해 주춤거리게 만드는 효과가 더 크다. 그냥 딱 봐도 위험해 보이니 피하게 되는 양아치보다 평범한 일반인으로 보이는 자가 성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더 많다. 겉보기에 속아 방심하기 때문. 어떤 가수도 밤길에 여성 뒤쫓아 놀래는 장난이 취미라지 않던가. 그럴 때 호루라기가 유용하다. 힘껏 불어 상대가 주춤하면, 그 틈에 달아난다. 어느 날 밤길 걷는데 저만치 어떤 아가씨가 앞서 걷더라. 나는 그저 내 갈 길 가는 건데 괜히 쭈뼛쭈뼛 눈치 보더니 가방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입에 무네. 그래, 서바이벌리스트로서 훌륭한 처자로다 감탄하며 걷는데 걸음이 좀 빨랐나, 꽉 깨문 호루라기가 가쁜 숨 따라 “호로로로 호로로로 호로로로” 가냘프게 울더라고. 웃긴데, 슬픈 소리, 딱하다. 상대를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인격과 존엄을 갖춘 한 사람으로서 보게 되면 제정신 챙기고 범죄를 포기하게 된다더니, 이런 마음인가 봐. 왠지 미안해서 제자리에 한참 서서 멀리 떠나보냈다. 부디 안전하시오, 빌며.
호루라기를 보면 2002년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섰던 독일 작가 권터 그라스가 떠오른다. “천천히 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 꽉 찬 관중석 / 고독한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고 / 그러나 심판은 호루라기를 불었다 / 오프사이드” 축시 낭독 후 관중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아마도 짧아서 더 크게 환호했던 것 같다. 축구공이 떠올라 골대 쪽으로 날아가면 경기장은 후끈 달아오른다. 그 순간, 이성 따위는 온데간데없다. 뭐든 어떻게든 되어도 좋아! 오직 골대를 향한 맹목적 쇄도와 열띤 관중의 광기만 존재할 뿐, 축구는 전쟁이니까! 그때 심판이 부는 호루라기는 경기장에서 유일한 냉정함, 김을 뺀다. 그리고 다들 정신 차리고 투덜댄다. 오프사이드 맞다 아니다 따지기, 어쨌거나 이성의 회복. “다들 제발 정신 좀 차려! 여기도 오프사이드! 저기도 오프사이드!” 막 불고 싶은 시절이라 더욱 값지게 느껴지는, 반칙을 반칙이라 죄를 죄라 외치는 물건.
박지훈 소프트웨어 디자이너zeensai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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