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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12 19:51 수정 : 2014.03.13 10:23

일러스트레이션 박지훈

[매거진 esc] 박지훈의 서바이벌 대작전

중국 쿤밍 철도역, 검은 옷 맞춰 입고 검은 복면 쓴 자 8명이 긴 칼 마구 휘둘러 30여명이 사망하고 140여명이 다쳤다. 중국 정부는 신장위구르 독립을 획책하는 세력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테러라고 발표했다. 테러는 약자의 유일한 무기라는 말, 참 슬프다. “100명을 죽인다 해도 내 한 목숨 내놓으면 그만 아닌가!” 지구촌 저항세력들 제각각의 울분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서럽고 딱한 설움이 서려 있다. 하지만 테러 희생자는 대개 더 약한 자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슬프다. 결국 테러는 여타 모든 폭력과 마찬가지로 강자의 무기구나, 인간이 자기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남의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사는 한 테러는 절대 사라지지 않겠거니, 불길한 생각은 끝도 없다. 역시나 폭력은 끔찍할수록 정치적 해석 분분한 법, 미국은 이번 사건 가리켜 ‘끔찍하고 무의미한 폭력’이라 말하고 중국인들은 ‘이게 테러가 아니라 폭력이면 9·11 사건은 유감스러운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맞섰다. 강대국 되면 테러리즘 공포마저도 독점하고 싶은가 보다. 우리쯤 되어야 테러라 할 만하지? 강대국 되어 본 적 없으니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말다툼, 정말 끔찍하고 무의미한 폭력이란 바로 이런 말장난이구나 싶다.

칼을 든 적을 만났을 때 필히 따라야 할 세 가지 규칙. 첫째, 달아나라. 둘째, 달아나라. 셋째, 달아나라. 칼은 흉기. 흉기와 맞서는 상황은 무조건 피하는 게 좋다. 어떻게 미리 알고? 글쎄, 직감? 괴상한 말 같지만 직감은 위험을 사전에 인지하는 동물의 본능. 모든 것을 논리적 사회적 관습적으로 해석하는 훈련에 익숙해져 그만 거의 잃어버린 본능이지만 그래도 사람은 어쨌든 동물. 왠지 모를 수상함이 느껴지면 자리를 피한다. 물론 오해인 경우가 훨씬 더 많을 테니 무례하지 않은 태도로 적당히. 미처 피하지 못했다면? 돈 달라면 그냥 내주라. 돈과 목숨, 뭐가 더 중한가. 다짜고짜 찌르고 덤빈다면 최대한 칼 범위 밖을 맴돌고 전봇대 등 빙빙 돌아 피할 수 있는 장애물을 사이에 두라. 얼굴에 모래나 동전 등 작은 물체를 던진다. 눈에 꽂힐 확률 높게 최대한 많이. 우산이나 지팡이 등 긴 막대가 있다면 들고 거리 유지하며 공격을 분산한다. 그리고 찌르기, 휘두르면 안 된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예비 동작을 들키고 길이가 길수록 휘두른 뒤 도로 거두어 원위치로 돌아오는 데 오래 걸린다. 주변에 막대가 없다면 질긴 가죽 가방이나 겉옷 등 두꺼운 천으로 손과 팔 친친 감고 막는다. 혁대나 옷 끝을 쥐고 손목을 노려 힘껏 내던지고 빠르게 잡아채며 칼을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 미리 훈련이 필요하다.

험한 시절 어떤 거친 사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 평소 칼을 휴대해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당방위의 헛된 판타지. ‘위법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 있는 행위’라는 참 애매한 기준에 대한 판단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법관이 한다. 그리고 칼은커녕 그 흔한 삼단봉도 대개 과잉방위로 해석된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흥할 방법이 없다. 칼로 지킬 수 있는 미덕도 없고 가치도 없다. 어쩌랴, 그런 시대에 태어났다.

박지훈 소프트웨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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