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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09 19:39 수정 : 2014.04.10 15:51

일러스트레이션 박지훈

[매거진 esc] 박지훈의 서바이벌 대작전

생존 삶의 현장, 치열한 영화판. 올 로케이션 세계 곳곳 누비며 극한상황을 넘나든다. 영화미술팀만 보더라도 대개 벽에 액자 걸고 화병에 꽃 꽂아 세트 장식하는 우아한 자들을 떠올리지만 웬걸, 특수부대 출신 시커먼 아저씨들만 드글드글하다. 그 거친 사내들에게 묻는다. 영화는 무엇으로 찍습니까? “청테이프로 찍습니다.” 그렇다. 장비 이름 외기도 벅찰 만치 이것저것 물건 많은 현장에서도 가장 막강한 건 역시나 청테이프. 굉장한 존재감 자랑하는 시(C)스탠드도 애플박스도 청테이프 앞에선 깨갱. 포커스 마킹하고 동선 찍고 꼬인 선 정리하고 광우병 걸린 소처럼 주저앉는 삼각대 묶고 그립 보강하고 덜렁덜렁 반도어 고정해 유산지 씌우고 빛 새는 틈 막고 빛 먹는 암지 붙이고 등등, 그야말로 만능. 무지 질긴데도 가위 없이 맨손으로 찍 찢을 수 있고 구멍도 딱 적당해 팔찌처럼 주렁주렁 차고 다닐 수 있어 참말로 편하다. 무슨 이런 굉장한 물건이 다 있나! 그러나 단점 아주 없진 않아 붙였다 떼면 남는 끈끈이, 특히 열 받아 녹으면 아주 징글징글하다. 그래서 요즘은 청테이프 대신 흔적 남지 않는 ‘개퍼 테이프’를 많이들 쓰지만, 품질 차이 확실하나 값 차이는 훨씬 더 크다는 게 흠.

제2차대전 당시 미군이 탄약상자 습기 막으려고 군납 공모했던 ‘손으로 찢는 방수 테이프’가 전후 민간에 풀렸던 게 바로 청테이프의 원조 ‘덕 테이프’, 거의 모든 긴급상황에 완벽하게 대응한다. 움직여야 되는데 안 움직이면? 더블유디(WD)40, 안 움직여야 되는데 움직이면? 덕 테이프, 전설이다. 덕 테이프만 들고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실험도 성공했고, 모든 창과 문의 틈을 테이프로 밀봉해야 한다는 뜻으로 화생방 경보를 ‘덕 테이프 경보’라고도 하니, 궁극의 서바이벌 아이템. 흔히들 ‘덕트(Duct) 테이프’라 부르기도 하지만 유래 따지자면 ‘덕’(Duck)이 맞다. ‘오리’가 아니라 ‘돛천’을 일컫는 말. 올 성긴 천 한쪽 면에 폴리에틸렌 바르고 반대쪽 면에 접착제 발라 만든다. 변종으로는 빛 반사 적은 소재에 잔류물 최소화해 촬영장 요구에 맞춘 ‘개퍼 테이프’, 강도를 한층 더 높인 ‘고릴라 테이프’, 비행기 수리에도 사용할 수 있는 ‘스피드 테이프’ 등이 있다. 비행기를 테이프로 고쳐? 피격당해 구멍 뚫린 날개에 친친 감아 다시 날린 사례가 많다 보니 결국 고속을 견디는 고강도 테이프를 따로 만들었다. 어디 비행기뿐이랴. 총도 고치고 헬리콥터 로터도 고치고 우주선 수리에도 쓴다. 아폴로 13호 고장 났을 때 덕 테이프로 대충 땜질해 고친 사건 이후 공식 우주선 수리도구가 되었다. 물론 일반 ‘싸제’와는 좀 다른 물건이지만.

임시변통이 공식지침으로 상승하는 과정, 그게 바로 융통성 아닌가 싶다. 그때그때 사정과 형편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재주. 경직된 사회에서는 그런 게 참 안 된다. 답답하다. 그러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등 옳은 말 들을 때조차도 난 덕 테이프를 떠올리곤 한다. 정당하게 패하겠군 이 싸움, 뭐 그런 허무감도 대개 안타까운 결과로 끝나고. 아 좀, 대충 땜질해 쓰자고, 이기고 보자고, 살고 보자고, 뭐 그런 바람의 상징물이다.

박지훈 소프트웨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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