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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29 12:04 수정 : 2013.08.26 10:41

이영훈의 <상자> ⓒ전지은

이영훈 소설 <1화>



아니요, 아닙니다. 눈은 날 때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중에 먼 것이 아닙니다. 저에 관한 풍문이라면 들은 바 있지요. 점치는 소경 놈의 영험함이 지나쳐 신명이 성을 내어 눈을 앗아 갔다든가, 되레 영험함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눈을 팠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하지만 나리, 눈을 파 영험함을 얻을 수 있다면 저잣거리 점복 놈들의 눈알이 남아날 리 있겠습니까? 아둔한 놈들은 진짜로 눈을 팔 것이고, 그나마 약삭빠른 놈들은 일부러 보이지 않는 척을 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신통하다 우기겠지요. 애초에 소경의 점복이 더 용하다는 것도 다 헛소리입니다. 고사에 영험한 점쟁이로는 곽박이나 원천강을 드는데 이들이 능했던 것은 천문과 풍수였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땅이나 별을 살피겠습니까? 앞을 못 보는 것은 그저 병신입니다. 점복의 용함과는 관계가 없지요.

신명의 화를 샀다는 소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출에 유복자에 눈도 보이지 않는 놈의 목숨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문초를 당하고 있는 제 꼴을 보십시오. 높으신 분들의 화를 사도, 아니 화를 사지 않아도 이런 꼴인데 하물며 신명이 성을 내면 오늘까지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풍문이란 늘 그런 식이지요.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모르는 곳에서 지어져 바람을 타고 와 목을 조릅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끌려온 것이 억울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나리께서 밝히신 저의 죄목은 점쟁이 주제에 요사스러운 풍문을 지어내 어리석은 놈들을 홀렸다는 것인데, 말씀드렸다시피 입에서 입으로 바람처럼 전해지는 말이야 제가 지은 것이 아니고, 그 풍문을 믿은 놈들의 어리석음이야 제 탓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저는 지은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 장님 저 죽을 날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평생 보지도 못하고 살아온 상놈이 무슨 재주로 말을 지어내겠습니까. 들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장님 저 죽을 날 모른다는 말을요. 묘한 일입니다. 저는 그 말을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듣고 살았는데 말입니다. 지금의 제 처지와 딱 맞는 말 아닙니까?

분명 점복을 업으로 삼긴 했습니다. 나라에서 점복을 금한다면 그것이 죄겠지요. 하지만 점복이 아니면 앞 못 보는 놈이 입에 풀칠할 방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점을 보지 않았다면 어디의 비렁뱅이로 쉬어 터진 밥이나 먹고 살았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잡혀 올 일도 없었을 테니 그 또한 묘한 일입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점을 본다는 것은 말을 지어낸다는 의미가 아니잖습니까? 점을 보는 것은 점괘를 보는 것, 그리고 괘를 본다는 것은 나름의 방법에 따라 나온 결과를 보고 읽는 것입니다. 기실 괘는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됩니다. 제가 아는 점복가 가운데 가장 특이한 자는 남쪽에 사는 노파인데, 독에 뜬 장에서 괘를 읽습니다. 점복이 죄라면 그 노파도 여기 잡혀 와 있습니까? 보이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를 발고하려는 것은 아니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제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데 어찌 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찾아오는 사람들 앞에서 점을 보는 시늉을 한 적은 있습니다. 저는 육효점으로 이름을 날렸지요. 육효란 것은 나리도 아시는 복희씨의 바로 그 육효입니다. 당장 닥칠 일의 구체적인 결과를 알아보는 것에 주효하지요. 점을 보는 시늉은 대충 이렇습니다. 산통에 산가지 여섯 개를 넣고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통을 흔들다 상 위에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가지가 펼쳐진 모양을 계산하여 뜻하는 바를 읽어내는 것인데, 실은 이것이 좀 엉터리입니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손으로 산가지를 더듬어 괘를 읽어야 하는데, 가지가 펼쳐진 모양을 살피려 손을 뻗으면 어느새 모양이 흩어지고 맙니다. 그러니 잡히는 것은 늘 제 손에 밀리거나 돌아간 산가지의 형태이지요. 평생 한 번도 산통에서 뿌려진 그대로의 산가지를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 점 보는 시늉을 탓하는 이 역시 한 명도 없었지요.

괘가 어디에나 있으니, 그러니까 땅이나 별에도 있고, 산가지 여섯 개나 새벽 나절의 어슴푸레한 빗줄기나 심지어 먹는 과자와 독에 뜬 장에도 있으니, 그걸 읽는 일은 별것이 아닌데, 정작 문제는 점복이 읽는 괘가 남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의 것이라면 읽은 대로 벌어질 테니 나머지는 지루한 기다림뿐이지만 남의 괘라면, 본 것을 읽어 주어야 하지요.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점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본 점괘를 말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지어낸 말을 요사하게 흘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말이란 것은 언제나 기이하게 뒤틀리는 것이지요. 풍문처럼 여러 사람의 입을 탄 말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리에서 전한 말이나 때로는 전하지 않은 말조차 오해를 부릅니다. 그렇게 보면, 아니 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산통을 흔드는 저의 시늉도 썩 무용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뒤틀릴 말이라면, 가지가 놓인 모양 따위야 큰 문제도 아니지요.




이영훈(소설가)



이영훈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소설〈거대한 기계〉가 당선되어 등단했다.〈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로 제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으며,《체인지킹의 후예》로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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