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소설 <2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점복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이었으니 서른서너 해쯤 되었을 것입니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오기에 그날 일은 글렀구나 싶어 쪽마루에 팔을 괴고 누웠지요. 비가 오면 사위의 소음이 가라앉고, 소음이 들리지 않으면 자연스레 들리지 않던 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지요. 투둑투둑, 생경한 소리가 들려 무슨 소리인지 가늠해보니 볏짚 지붕에서 물방울이 굴러 주춧돌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료하여 돌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수를 헤아렸습니다. 한 삼천 개쯤 세었을 때, 초동 하나가 대문 처마 밑에 나뭇짐을 내려놓고 비를 피하는 겁니다. 묘한 놈 아닙니까? 비 오는 날 땔나무를 줍다니요. 젖은 나무를 어디에 쓴단 말입니까?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초동에게 정신이 팔려 세던 물방울도 까먹은 참에 저놈 운이나 떼어 보자 싶어 방에 두었던 산통을 들었지요. 통을 흔들고 가지를 펼친 후 괘를 더듬었는데, 그만 손을 잘못 놀려 산가지 하나가 쪽마루 아래로 떨어진 겁니다. 낭패였지요. 방에서 가지를 놓았다면 어디에 빠지더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테지만, 쪽마루에서 떨어진 걸 찾는 일은 눈을 뜬 사람에게도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손을 짚어 찾았지만 진흙만 묻어 나왔지요. 일이 그렇게 된 것도 다 초동 때문이니 아이를 불렀습니다. 거기 비 피하는 애야, 이리 좀 와라. 쭈뼛거리며 앞에 선 초동이 그러더군요. 장님이시오? 보면 모르느냐. 앞도 못 보는 이가 나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소? 다 아는 수가 있다. 아무튼 떨어뜨린 산가지 좀 주워다오. 아이가 몸을 움직였는지 풀 비린내 섞인 살 내음이 났습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소. 잘 찾아보아라. 너 때문에 떨어뜨린 가지니. 나 때문에요? 너 때문이다. 어째서 나 때문이오? 네 운을 떼다가 떨어뜨렸으니 너 때문 아니냐.
아이가 묻더군요. 운은 어찌 나왔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 점을 끝까지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통에 든 산가지는 여섯이 한 묶음입니다. 이 가지들은 한 번에 만들어 한꺼번에 쓰는 것이지요. 따로 떼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 하나를 떨어뜨려 찾을 수 없다면 남은 산가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그 산통은 초동에 대해 굴린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요. 초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사실 저는 언제나 틀리지 않는 점을 말하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쉽지요. 누가 찾아오든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당신은 죽소.
그렇지 않습니까? 산몸이라면 모두 언젠가는 죽지요. 이 점괘만큼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으니까요. 어차피 점괘를 다 보긴 틀렸고, 그래서 초동에게 그리 말했습니다.
너, 이제 죽는다.
그다음에는 뭐 뻔하지요. 죽는다는 소릴 듣고 제정신인 놈이 어딨겠습니까. 조금 담이 커봐야 침을 뱉고 성을 내거나, 그게 아니면 울고불고 난리지요. 초동도 그랬습니다. 개돼지처럼 꺽꺽대는 꼴이 아주 우스웠지요. 어떻게 죽는지 소상히 알려 달라 울부짖더군요. 알 리가 없잖습니까? 괘를 다 더듬어 보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래 말했지요. 점을 다 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찌 아니. 그럼 남은 점을 봐 달라고 하더군요. 이상한 말이지요. 저는 점을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발악인지 애원인지 졸라대는 초동에게 못 이겨 점을 보고 싶으면 산가지를 찾아 달라고 했습니다. 남은 점을 보고 싶어 아등바등 쪽마루를 뒤지는 초동의 꼴이 눈을 감고도 훤히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죽는다는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맨정신으로도 못 찾은 산가지가 눈에 보일 리 있습니까? 뒤져도 뒤져도 산가지가 나오질 않으니까 이놈이 아예 마당 한가운데서 자지러지더군요. 슬슬 귀찮기도 하고, 찬바람에 몸이 식어 방에 들어가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해서 초동에게 그랬지요. 남은 점 얘길 들려줄 테니 해 온 나무 중에 길쭉하고 곧은 놈 있으면 하나 내놔라. 초동이 가져온 엄지손가락만 한 굵기의 싸리나무 가지를 받아 들고 그 결을 손으로 훑어보았습니다. 만져보니 새 산가지가 될 물건이더군요. 싸리나무 가지로 흩어놓은 산가지를 가리키며 초동에게 물었습니다. 가지가 몇 개 남아 있니? 다섯 개요. 바닥에 떨어진 산가지는 찾지 못했지? 아무리 뒤져도 없소. 원래 산가지는 여섯 개가 한 조다. 싸리나무 가지를 손에 탁탁 놀리며 말을 이었습니다. 덕분에 새 산가지 감이 생겼다. 초동은 입을 다물고 남은 점괘를 재촉했습니다. 그래 말해줬지요. 있어야 할 가지에 하나가 비었으니 객사 아니겠니. 객사요? 그래, 집 밖에서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고는 싸리나무 가지를 챙겨 방으로 기어들었습니다.
없던 말을 해 놓았으니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뒤에 벌어진 일을 따져보면 제가 아주 없는 말을 지은 것은 아니지요. 비가 그치고 보름쯤 지났을 때, 손님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인근 마을에서 머슴을 살던 아이 하나가 죽을 점을 받아 오더니 정말로 죽어 버렸다고 말입니다. 듣자마자 초동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딱한 얘기였지요. 손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어느 길에서 죽었소? 길이라뇨, 자기 방에서 죽었습니다. 방에서 죽어? 예, 점을 받은 날부터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오들오들 떨더니만, 서까래 하나가 무너져 머리를 맞고 죽었지요.
어리석은 놈 아닙니까? 객사라는 얘길 듣고 길에서 죽을까 봐 집 밖으로 아예 나가질 않은 겁니다. 앉은뱅이도 아닌 놈이 평생 안 나갈 것도 아니면서 괜히 방에 틀어박혔다가 명을 재촉한 게지요. 초동이 머물던 방의 서까래는 필시 여섯 개였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요.
아무튼 하려는 말은, 제가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그저 벌어진 일을 전한 것이지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면 멍청한 아이를 골린 것이 되겠지만, 죽을 점을 주었더니 진짜로 죽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객사는 아니지만 그게 죽은 놈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방에서 죽든 길에서 죽든, 죽는 것은 죽는 것이지요.
다만 이런 것은 궁금합니다. 초동의 점괘는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처음 산통을 뿌렸을 때 손으로 건드리기 전의 점괘, 손으로 건드린 후에 없어져 버린 점괘, 제 입을 타고 그 아둔한 놈에게 전해진 점괘. 그 점괘들은 각기 다른 것이었는데, 우습게도 벌어진 일이 맞아떨어져 용한 점복가가 되어 버렸지요. 남은 산가지 다섯 개가 놓인 모양을 본 것처럼 기억하고 있습니다. 죽을 점을 말하자 나자빠지던 아이의 울부짖음이나 새로 받아든 싸리나무 가지의 감촉도 방금처럼 생생하지요. 때로는 제가 건드린 산가지가 떨어지는 모양과 아이의 머리를 찧은 서까래의 생김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길쭉한 나뭇가지, 혹은 나무통이 소리 없이 바닥으로, 아이의 머리로, 쿵, 떨어져 내리는 것이 겹쳐 보이기도 하지요. 아니, 물론 보이지는 않지요. 본 것 같다는 것입니다. 본 적이 없으니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을 구분할 수도 없지요. 무엇이 아이의 점괘였을까요. 처음부터 죽을 일이 정해져 있었을까요? 아니면 점괘를 전한 제 말이 서툴러 죽은 것입니까? 그날 아이의 점을 보지 않았다면 아이는 죽지 않았겠습니까? 비 오는 날 굳이 땔나무를 하러 다닌 초동은 죽으려고 젖은 나무를 주워 모은 것입니까? 아니면 제게 새 산가지를 쥐여 주러 온 것일까요? 어쨌거나 아이가 해 온 싸리나무 가지를 새 산가지 삼아 이날 이때까지 먹고살았으니 모두 아예 무용한 것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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