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소설 <3화>
아니요, 아닙니다. 제 점이 영험하다고 항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경이란 것이지요. 점을 본 것도,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그저 입을 놀렸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점괘는 피할 수가 없고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어리석은 놈들의 사정이지요. 제게는 그런 일이 평생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리의 말씀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점복이 국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같은 일을 하는 놈들이 다 잡혀 와야 할 것인데, 끌려와 묶인 것은 저 하나뿐 아닙니까. 혹여 저에 대한 요상한 풍문이 지나쳐 본을 보이시려는 것이라면 그나마 알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저는 억울한 꼴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입으로 제가 용하다, 영험하다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요. 다른 놈들이 뭐라 떠드는지는 제 알 바 아닙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처음 말씀하신 상자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상자에 든 것을 맞히면 목숨은 살려준다 하셨지요? 그런데 점복은 국법으로 금한 것 아닙니까? 나리의 말씀은 그러니까, 국법을 어겨 끌려온 것인데, 살고 싶으면 다시 국법을 어겨 보라는 것입니까?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물론 상자라면 잘 알고 있지요. 아마 저만큼 상자에 대해 잘 아는 놈은 세상 천지에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아는 상자는 나리가 말씀하신 상자가 아닙니다. 나리가 말씀하신 상자는, 나리가 들고 계십니까? 아니면 제 앞에 놓여 있습니까? 보이질 않습니다. 크기는 얼마만 한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색을 입혔다면 무슨 빛깔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본 적도 없는 상자인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리가 없잖습니까.
제가 아는 상자는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열리지 않는 상자이지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소상히 고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이니 나리께서도 쉬이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 같으셨지요. 소경 놈이 어디 밭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니 내버려뒀다간 거지나 해 먹을 운이었습니다. 그런데, 열 살 되던 해에 집에 나환자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코는 문드러지고, 눈알은 한쪽만 남은 흉측한 생김의 문둥이였지요. 그런 놈이 자기 집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어머니께 아들놈을 내놓으라고 한 겁니다. 실성한 놈인가 싶어 내쫓으려고 하는데 문둥이 말이, 아들이 점복가가 될 팔자니 자기에게 맡기면 잘 가르쳐보겠다는 겁니다.
덜컥, 어머니는 그 말을 믿어 버렸지요.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저를 문둥이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어쩌면 입이라도 하나 줄여 보려 그리하신 걸지도 모르지요. 문둥이의 손에 끌려 걷고 또 걸었습니다. 어느 지방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이윽고 알 수 없는 곳에 이르자 문둥이가 손을 놓더군요.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을 때, 문둥이가 말했습니다. 앞으로 걸어라. 장님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떨어졌으니 문둥이의 말을 듣는 수밖에요. 시키는 대로 몇 걸음을 떼었는데 뭔가에 무릎이 걸려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곧이어 등 뒤에서 뭔가 확 닫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몸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사방이 온통 막혀 있어 할 수가 없었지요. 나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둥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알겠느냐? 알 리가 없지요. 찧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입을 다물고 있으니 문둥이가 말했습니다. 상자에 넣어 두었다. 나오고 싶으냐? 말해 무엇합니까. 당장 꺼내 달라고 울어 댔지요. 문둥이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엿새를 주마. 여섯 날이 지나는 동안 어느 하루에는 상자를 열어 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열어 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언제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지 맞춰 보아라.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있는 대로 힘을 주어 벽을 밀고 걷어차 보았지요. 하지만 어린애 기운으로 무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앞을 보질 못하니 갇힌 곳의 어둠은 참을 만했지만 엿새 동안 꼼짝도 못 하고 좁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려웠지요. 게다가 문둥이가 엿새를 이야기했어도, 여섯 날 중 하루에 문을 열어줄 것이라는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대로 굶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두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상자의 벽을 두드리고, 바닥에 엎드려 자지러지고, 살려달라 소리를 지르다, 이내 힘을 잃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깨면 다시 벽을 두드리고, 바지에 오줌을 싸고, 먹은 것을 토하다 또 잠을 잤지요. 며칠이 흘렀는지, 아니면 단지 몇 시진이 간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몹시 지쳐 뻗어버렸습니다.
사람이란 묘한 것이지요. 기운을 다 소진하고나니 어쩐지 머리가 맑아지는 겁니다. 제가 싸고, 토한 것 위에 엎드려 있는 동안, 문득 어떤 생각이 들더군요.
문둥이는 제게 엿새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여섯 날이 지나는 동안 어느 하루에는 상자를 열어주는데, 어느 날 열어줄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 아닙니까? 이를테면 다섯 날이 지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엿새가 되는 날에는 문둥이가 상자를 열어 줄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엿새째 되는 날엔 문둥이가 상자를 열어줄 리 없지요. 그날이 되면 문이 열릴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같은 이치로 닷새가 되는 날에도 상자는 열리지 않습니다. 문을 열 수 없는 엿새를 제외하면 남은 것은 다섯 날뿐인데, 그렇다면 넷째 날이 지난 뒤에 닷새가 되었을 때, 그날 문이 열릴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닷새가 되는 날에도 상자는 열리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나흘째에도, 사흘째에도 상자는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문둥이가 상자를 열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항간에 나환자들에게 인육이 특효약이라는 풍문이 있지요. 요즘도 문둥이 놈들이 아이를 잡아다 고아 먹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오지 않습니까. 몹쓸 문둥이가 어머니를 속여 저를 잡아다가 굶겨 죽인 후 약으로 쓰려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새삼 나갈 방도를 찾아보려 해도 한참 동안 악을 쓰느라 힘이 다한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지요. 몸을 말고 누워 쌕쌕, 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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