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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1 10:01 수정 : 2013.08.07 14:10

이영훈 소설 <4화>


그때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이 멀면 귀가 밝아진다는 소리가 있는데 그것은 거짓이 아니지요. 보질 못하니 자연스레 여러 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발끝 쪽에서 사부작사부작, 조심스레 걷는 소리가 났습니다.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요. 언젠가 사당패가 동네를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볼 수도 없는 것을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졸라 판이 벌어진 곳을 기웃거렸지요. 어름사니가 줄 위에 오르던 소리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사부작사부작, 얼음 위를 걷듯 조심조심 발을 딛는 소리를. 상자 구석에서 무언가 줄을 타 오르고 있었습니다. 거미 한 마리가 구석 모서리에 집을 짓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어리석은 놈이었지요. 상자는 열리지 않을 테니 나나 제 놈이나 꼼짝없이 거기서 굶어 죽을 운명인데 말입니다.

헌데 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거미가 노리는 먹이가 다름 아닌 저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나비 같은 먹이가 자기 줄에 걸렸을 때 그러하듯, 미리 줄을 쳐 제 몸을 칭칭 감아 놓고는, 나중에 제가 죽으면 살을 파먹을 속셈일지도 모른다고. 그리 생각하면 참으로 영악한 놈 아니겠습니까?

거미의 몸에서 나온 끈적끈적한 줄로 제 몸을 감는 데에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엿새는 부족할 것이고, 십 년? 아니면 이십 년? 혹은 백 년일 수도 있고, 천 년일 수도 있고. 사람이란 제 명을 넘어서는 시절을 상상하지 않지요. 누구 하나 죽어 나간 후에도 천지는 그대로인데 아무도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미가 줄로 제 몸을 감은 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백 년, 천 년, 만 년을 넘어 그 줄은 계속 이어집니다. 한쪽 끝에는 죽은 제 몸이 달리고, 줄의 중간에 백 년이 놓이고, 천 년이 놓이고, 만 년이 놓이고, 다른 끝에는 추량할 수 없는 시간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거미가 줄을 친 쪽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제 몸이 묶일 줄을 만져라도 보고 싶었지요. 사부작사부작,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손을 더듬었습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손을 마구 허우적거렸지요. 상자의 벽이 손에 닿았을 때, 손바닥에 이물감이 들었습니다. 이물감이 든 곳을 살폈습니다. 끈끈한 것이 묻어 있기에 감촉을 더듬어보았더니 자그마한 벌레의 다리 몇 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급히 손을 뻗는 통에 거미를 눌러 죽이고 만 것이지요.

그 순간 알아야 할 것을 모두 깨달았습니다. 작은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이 있고, 그 시간과 제가 이어져 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상자에 갇힌 것처럼, 혹은 줄에 묶인 것처럼 벌어질 일들은 모두 정해져 있는데, 오직 손을 놀리기만 해도 많은 일이 틀어지는 것이지요. 퍼뜩 머리를 맞은 것처럼 열이 올랐고, 관자놀이에 땀이 흘렀습니다. 오줌을 싼 아랫도리는 축축했고, 바닥에 토해 놓은 것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지요. 짓뭉개진 거미는 문둥이의 문드러진 코처럼 달콤한 진물을 뿜고 있었습니다. 산 것은 뜨겁고 축축하고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앞의 것을 분간할 수 없지요. 보질 못해서가 아닙니다. 상자 안에서는 모두 새까맣게 물들어 누구도 무엇 하나 분간할 수 없지요. 천 년이든 만 년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알아도 모르는 것이니, 모르는 것은 애당초 없지요. 상자 안에서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닙니다. 삶과 죽음이 뒤섞여 도무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살거나 죽으려면 상자가 열려야 하는데 문둥이의 말대로라면 상자는 열리지 않지요. 눈앞의 사연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만사가 다 깜깜하니 우리는 모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지요.

그때, 머리 위로 바람이 들었습니다. 잠시 멍한 기분으로 있다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지요. 머리통에 부딪치는 것이 없었습니다. 상자가, 열린 것입니다.

몹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처음엔 문둥이가 열어준 것인가 생각했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핏, 제가 직접 손을 더듬어 상자를 연 것 같은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는 안에 갇혀 있었으니 동시에 밖에서 상자를 열 순 없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직접 상자를 열어 그 안을 본 듯한 기억은 확연했습니다. 열기 직전의 설렘도, 열 때의 두려움도, 열고 난 후의 씁쓸함도 모두 제 것이었지요.

어떻게 열린 것이든 열렸으니 주저할 노릇이 아니었지요. 산 것이 결정된 고양이처럼 모서리를 넘어 훌쩍 밖으로 나왔습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이 없었습니다.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밤이었을 것입니다. 모두 잠들어 조용했으니까요. 어쩌면 저도 잠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걸음을 떼어도 아무 일이 없기에 내처 발길 가는 대로 걸었습니다. 길을 따라, 풀을 헤쳐,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집이었습니다. 힘이 다해 쓰러진 후 며칠을 앓았지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어머니에게 청해 나뭇가지 하나를 얻었습니다. 가져오신 싸리나무의 결을 짚어 보니 산가지가 될 물건이더군요. 그것을 깎아 산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이후는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비 오는 날, 잃을 때까지 그것을 점복의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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