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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2 10:08 수정 : 2013.08.07 14:11

이영훈 소설 <5화>



나리, 이래도 제게 상자 안에 든 것을 맞춰 보라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답은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제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고 저는 그 말을 알고 있지요. 나리가 말리셔도 저는 그 말을 고할 것입니다. 상자라면,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육시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게 뭡니까. 아는 대로 고하면 저는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나리의 말씀대로라면 그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는 누구도 몰라야 하지 않습니까? 국법이 점복을 금하고 있고, 용한 점복으로 이름이 나 여기 잡힌 것이라면, 그 점복으로 나리의 물음에 답하는 것 자체가 죽을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안에 든 것을 맞추면 정말로 저는 살 수 있습니까? 줄에 묶인 제 꼴은 상자 안의 그것과 다르지 않군요. 어쩌면 내내 거미줄에 묶여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상자 안에서 굶어 죽은 이도 있으니 제 운이 더 나은 편인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어찌 밖에 나와 숨을 부지하나 싶었더니 또다시 이 꼴입니다. 죽는 일이 그저 죽는 것이라면 어떻게 죽든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애초부터 저는 그런 운이었습니다. 만사 다 깜깜하여 삶과 죽음을 분간할 수 없지요.

저는 형편없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입에서 뱉는 것마다 전부 거짓이지요. 죽을 일을 아는 점복가가 정해진 그대로 죽는 일이 가능할까요? 헌데 버젓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든 제가 할 말은 정해져 있는데, 스스로 운을 여기까지 재촉해 왔으니 저는 다른 누구보다도 아둔한 놈입니다. 이러니 장님이 저 죽을 날 모른다는 말이 그리도 유명해진 것이겠지요. 들어보신 적 없습니까? 묘한 일입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더는 요상한 말로 답을 피하지 않으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답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상자를 열어 이 천한 장님의 목숨을 결정해주시지요.

오늘 새벽 첫닭이 울기 전에 다섯이 죽을 것입니다.

2.

텅 빈 조정은 차고 어두웠다.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곁에 상자를 놓은 후 엎드렸다. 왕이 모습을 드러내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나는 머리를 조아렸다. 왕은 성정이 급했다. 새벽잠을 억지로 깨워 일으킨 것이니 자칫하면 화를 살 수도 있었다. 얼마 전, 새 후궁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새 그 후궁과 질펀하게 놀았다면 일찍 잠을 깨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자를 슬쩍 돌아봤다. 사실을 숨겼다가는 더 크게 화를 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눈을 옮겨 마룻바닥의 결을 쫓았다. 나란히 대어 놓은 마룻바닥의 널빤지에는 나이테의 흔적이 그려져 있었다. 둥글게 시작되어 겹겹이 점점 더 길쭉하게 뻗어나가는 나이테의 모습을 보니 괘는 어디에나 있다던 소경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읽는 방법을 모를 뿐, 하기에 따라서는 마룻바닥의 나이테가 꼬인 모양에서도 얼마든지 괘를 뽑아낼 수 있으리라. 이 자리에 소경이 있다면 내 점괘를 어떻게 말할까. 다 끝난 일을 두고 명을 재촉하는 운이라고 할까. 아니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니 올바르다 할까.

헛된 의문이다. 소경은 죽으러 갔고, 나는 괘를 읽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왕에게 고하진 않았지만 소경과는 초면이 아니었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내다보니 집안 일꾼 몇 사람과 소경이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물으니 소경이 마당에 엎드렸다.

“도련님, 나중에 벼슬에 오르시면 이 눈먼 놈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영문 모를 소리여서 대꾸를 찾지 못하자 소경은 아예 내 다리에 매달렸다.

“절대로,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일꾼들이 달라붙어 소경을 떼어내려 했지만 소경은 악착같았다. 욕설을 하고 두들겨 패도 소경은 그저 내 다리만 붙들고 있었다. 서너 명의 장정이 한데 뒤엉켜 마당을 구르고 있을 때 부친께서 나왔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물러나라.”

그 시절 부친은 아직 정정했다. 일꾼들을 물린 후 아버님이 소경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소경이 말했다.

“여기 아드님은 나중에 형조판서가 되십니다. 그때에 부디 저를 잊지 말아 달라 부탁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가만히 소경을 들여다보던 아버님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그리되진 않을 것이다. 이 녀석은 학문에 그리 밝지 못하고, 나도 이놈을 벼슬에 오르게 할 마음이 없다.”

이번에는 소경이 고개를 저었다.

“바란다 해도 평생 되지 않는 이들이 있고, 바라지 않아도 그리되어 버리는 분들이 있지요. 대감께서 바라지 않으신다 해도 그것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미천한 놈의 소원 하나 들어주시는 셈 치고, 나중에 저를 대면하였을 때 제 목숨을 생각해주시겠다는 각서 한 장만 써주십시오.”

근본 없는 소경 주제에 다짜고짜 찾아온 것도 모자라 각서라니, 경우 없는 소리였다. 정정하던 시절의 부친은 엄했다. 불호령이 떨어지고, 일꾼들에게 매를 맞는 소경의 모습을 떠올렸으나, 의외로 부친은 골똘히 생각을 하시더니,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소경에게 각서를 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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