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소설 <6화>
날이 저물고 부친이 나를 불렀다. 호롱의 가는 불빛이 어둡게 비치는 방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형판 대감.”
부친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좋으냐?”
당황한 모습이 우스웠는지 부친이 거듭 놀렸다.
“좋고 말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실성한 놈의 헛소리입니다.”
“그럼 실성한 놈에게 각서를 써준 나는?”
그저 농을 던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심스레 입을 뗐다.
“어리석은 놈의 마음을 위로하려 그러신 것 아닙니까.”
부친이 고개를 저었다.
“종이 쪼가리 한 장으로 무슨 위로가 된단 말이냐. 부질없다.”
“그럼, 각서는 왜 써주신 것입니까?”
부친은 입을 다물고 호롱불을 바라봤다. 호롱불에서 검은 그을음이 길게 올라가고 있었다. 부친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으로 그을음이 올라가는 불꽃의 끝을 희롱하며 부친이 말했다.
“형조라면 국법을 다루게 되겠구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그을음이 가볍게 흔들렸다.
“법이란 무엇이냐?”
부친이 물었다. 신중히 말을 고르고,
“인간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답했다. 부친이 코웃음을 쳤다.
“도리라면, 모두 그리할 터이니 필요 없지 않겠느냐?”
잠시 생각하고,
“그렇다면 이치겠지요. 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이치에 맞는 본을 세우는 것입니다.”
답했다. 부친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지킬 수 없는 법도, 옳지 않은 법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것을 이치라 할 수 있느냐.”
움직였다. 그을음이 흔들렸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법이란 무엇이냐?”
부친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부친이 소경에게 써준 각서가 떠올랐다.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약속이 아니겠습니까?”
부친이 크게 숨을 토했다. 한숨인지, 아니면 웃음인지. 그을음이 코로 확 끼쳐 왔다. 매캐하게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보아하니, 형판은 틀렸다.”
부친이 낄낄거렸다. 침묵이 흐르고,
“법은 말, 이다.”
부친이 말했다.
“임금이 뱉기도 하고, 신하가 올리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 시작은 말이다. 그런데, 말이란 허망한 것이다. 뱉는다고 해서 그리되진 않는다. 말로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
부친이 손을 거두었다.
“그래서, 법은 말이다,”
거둔 손의 손가락을 세워 서로 비비며 부친이 말했다.
“눈이 먼 것이다.”
부친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도리라 믿을 수도 있고, 이치라 생각할 수도 있고, 약속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들 다 관계없다. 그저,”
잠시 어두침침한 허공을 바라보던 부친이 내게 눈을 돌렸다.
“뱉은 말이 아무렇게나 흘러 다니다 산목숨을 덮치는 것이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떠올리듯 부친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각서를 써준 것은 그 때문이다. 묘한 일 아니냐? 눈먼 놈이, 눈먼 일에 대해, 눈먼 말을 청하는 꼴은.”
그을음 섞인 호롱불에 비친 부친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그래서 써주었다. 우스운 꼴이, 너무 딱해서.”
부친이 입을 닫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벼슬에 오를 생각은 아예 접어라.”
웃음을 거두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부친이 말했다.
“집안에 재산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너나 네 형제들이 굳이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입에 풀칠할 순 있을 것이다.”
다시 부친이 큰숨을 토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한숨이었다. 그을음이 흔들리고,
“선왕 시절부터 줄곧 관직에 있었으니, 네놈에게 자리 하나 봐주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부친이 고개를 저었다.
“흔히들 지위가 높아지면 권력이 생긴다고 믿지. 날벌레 같은 것들이 불 주변을 얼씬거리는 이유가 그것이다. 힘을, 빛이나 온기로 여기는 거다.”
손가락으로 호롱불을 가리키며 부친이 말을 이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다. 그것은 빛이나 온기가 아니야. 오히려 그것은,”
부친이 얼굴을 호롱불로 가져가 입술을 모았다. 훅, 숨을 토하자 불이 꺼졌다. 타고 난 냄새가 나고, 어둠이 덮쳤다.
“바람이 불면 꺼지는 것이다.”
먹처럼 캄캄한 방 안에서 부친이 말했다.
“밤이 늦었다.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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