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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6 10:46 수정 : 2013.08.07 14:11

이영훈 소설 <7화>



부친의 바람과는 관계없이 세월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자리에 와 있었다. 생각해 보면 묘한 운이다.

추국장에 끌려 들어온 소경을 보았을 때, 비로소 소경의 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를 까맣게 잊어버리진 않았으니, 잊지 말라던 부탁을 아예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소경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추국은 왕이 직접 주관하는 친국이었고,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실은 소경이 품에서 부친이 써주었던 각서를 꺼내는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왕은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경은 멋대로 저 할 말을 하다 참수장으로 끌려가 버렸다.

소경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렇다면 전에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험한 일을 겪어 받아 간 각서는 또 무엇이고. 여러모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장님 저 죽을 날 모른다는 말이 맞다 여길 수밖에.

아무렇게나 발을 쿵쿵 구르는 소리가 나고, 장지문이 열렸다. 고개를 한층 더 숙였다. 궐 안에서 저렇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왕뿐이다.

“일찍 깨우는구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왕이 말했다.

“송구합니다.”

“고개나 들고 말하여라.”

잠이 덜 깬 왕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그나마 나와준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왕을 바라봤다. 막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흰 야장 차림이었고 손질이 덜 된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몽롱한 눈에 치켜 올라간 눈썹을 보니 골이 난 것 같았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화를 사게 될 것이다.

“옷이 그대로구나. 밤새 기다렸느냐?”

왕이 말했다. 몸을 낮췄다.

“시급을 요하는 일이라 외람된 일을 했습니다.”

“일에 열심이구나. 보기가 좋다.”

생기도, 진심도 담기지 않은 메마른 말이었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었다. 용상에 반쯤 누운 왕이 손가락으로 수염을 어루만졌다.

“어제의 추국에 관해 고할 것이 있습니다.”

“눈먼 점쟁이 놈 얘기냐?”

“그렇습니다.”

왕이 피식 웃었다.

“그놈, 끌려 나갈 땐 볼만하더구나. 개돼지처럼 꺽꺽대는 꼴이 아주 우스웠다.”

왕이 개나 돼지가 꺽꺽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까?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손하게 눈을 깔았다.

“착오가 있었습니다.”

“착오?”

“정확히 말해,”

곁에 두었던 상자를 앞으로 내밀며 나는 말을 이었다.

“착오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왕이 손을 멈췄다.

“무슨 착오냐?”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상자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왕이 말했다.

“열어보아라.”

각별히 조심해야 할 순간이었다. 몸을 바닥에 바짝 붙이고 말했다.

“흉한 모습이라 보여 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일없다. 열어보아라.”

상자로 손을 옮겼다. 뚜껑을 열고 왕을 향해 상자를 내밀었다. 왕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럴 만했다. 상자 안에는 배를 가른 쥐와 그 뱃속에서 나온 덜 자란 새끼들이 들어 있었다. 갈라진 배에서 나온 피는 밤사이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발견한 것 그대로를 고스란히 다시 담았으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왕이 나를 노려봤다.

“새끼를 밴 놈이었더냐?”

“상자에 담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언짢은 얼굴로 왕이 물었다.

“따로 배를 갈라 본 것이냐?”

“그렇습니다.”

“다 끝난 추국 아니더냐. 굳이 배를 가른 이유가 무엇이냐.”

말 속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몸을 숙였다.

“친국이었기에, 더욱 결과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왕이 코웃음을 쳤다.

“일을 어렵게도 하는구나.”

고민보다는 잔뜩 귀찮은 표정으로 허공을 보던 왕이 문득 생각난 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상자 안을 살피던 왕이 물었다.

“새끼가 몇이냐?”

“셋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어미를 합해도 넷이로군.”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왕이 말했다.

“문제없지 않으냐. 소경 놈은 다섯이 죽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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