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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7 10:23 수정 : 2013.08.13 10:09

이영훈 소설 <8화>



내심 기다리던 말이었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참수장으로 간 소경까지 치면, 합이 다섯입니다.”

왕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일을, 참으로 어렵게도 하는구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왕의 말을 기다렸다. 먼저 입을 열 순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 한참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왕이 말했다.

“애초에 점복은 국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법을 어긴 놈의 목을 치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이냐.”

“결과를 맞히면 살려 주겠다 하셨습니다.”

“상자에 든 것을 물었는데, 그놈은 엉뚱한 숫자를 읊었다.”

“소경이 말한 것은 결과의 숫자입니다. 소경을 죽이면 그야말로 점복의 효력만 입증됩니다.”

“목을 치지 않으면 숫자는 거짓이 아니냐. 요설을 늘어놓은 놈을 살려두란 말이냐.”

“목을 치면 숫자는 맞아떨어집니다. 결과를 맞힌 것이니 목을 칠 수 없습니다.”

“목을 치면 놈이 말한 숫자가 맞는다. 다섯이 죽는다 했으니 다섯이 죽어야 하지 않느냐.”

“목을 치지 않으면 점복의 허위가 드러납니다. 하나를 살려 본을 세우는 것이 옳습니다.”

왕의 입이 비틀어졌다. 웃는 듯, 화가 난 얼굴로 왕이 나를 바라봤다.

“말이 길구나.”

왕이 숨을 골랐다.

“애초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왕이 말했다.

“그 눈먼 놈이 추국장에 묶여 들어왔을 때부터 살려 둘 마음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것은 알고 있다. 왕의 친국에서 살아 나간 이가 몇이나 되던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왕이 하품했다. 입을 쩝쩝 다시며 왕이 말했다.

“인간이란 것이 어차피 저 죽으면 다 끝이다. 천 년이나 만 년을 이야기하다니, 요망하지 않으냐. 손가락 하나로도 눌러 죽일 수 있는 목숨인데.”

왕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뒤틀리고,

“그놈에게 알려주고 싶다.”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말은 다 부질없고, 죽는 것은 현실이라고.”

다 틀렸나.

도리도, 이치도 없이, 바람이 불면 꺼지는.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을 때,

왕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눈먼 놈 목 하나 때문에 더 다툴 일도 없지.”

왕이 몸을 일으켰다.

“장님 저 죽을 날 모른다는 말이 옳구나. 그놈, 정말로 저 죽을 날도 모르는 모양이다.”

쿵쿵, 몇 걸음을 떼던 왕이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말이다,”

돌아선 왕이 뱉듯, 말했다.

“형판도 저 죽을 날을 모르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나는 목을 꺾었다. 맞는 말이다. 이미 한참 화를 샀으니,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목이다.

왕이 자리를 뜬 후, 상자를 챙겨들고 뒷걸음질해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엎드려 있었기에 사지가 온통 뻐근했다. 곁을 지키고 선 무관을 불렀다.

“참수장에 연락할 방도가 무엇이 있느냐?”

“보통은 목멱산에서 봉화를 띄웁니다만, 거리를 생각하면 봉화대보다 참수장이 가까워 시급한 사안에는 직접 사람을 보냅니다.”

“사람은 어디에서 보내느냐.”

“궐내의 역참에 당직을 맡은 사관이 있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잠이 깨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전할 말씀이 있으십니까?”

무관에게 용건을 전할까도 싶었지만 아무래도 못 미더웠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내 직접 전하마.”

상자를 옆에 끼고 역참을 향해 걸었다.

사위는 침침했다. 해가 뜰 무렵이었지만 지붕이 높은 궐에는 도무지 볕이 들지 않았다. 몇 걸음을 떼었을 때 비로소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임금과의 사이는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고 있었다. 별 관계도 없는 소경 때문에 괜히 미움을 살 필요는 없지 않나. 예전 일을 생각하면 소경과 아예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도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조차 아득하다. 그런데도,

대체 왜 소경을 살려 달라고 청원한 걸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죽은 쥐들이 상자 안에서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재촉하던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다 끝날 일이다. 어쩌면 이미 끝난 일일지도.

다시 달려가 임금 앞에 엎드릴까? 괜한 일로 마음을 어지럽혀 죄송하다고 빌어?

왕의 냉담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비웃음과 하품이. 인간이란 것이 어차피 저 죽으면 다 끝이다. 천 년이나 만 년을 이야기하다니, 요망하지 않으냐. 손가락 하나로도 눌러 죽일 수 있는 목숨인데.

왕이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요망하지 않은가. 왕은 왕이다. 그는 인간인 적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새삼 말을 물러봤자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말은 부질없고, 죽는 것은 현실이다. 법은 말이고, 도리나 이치도 그렇다. 약속도 말이고, 괘도 그렇다. 그것은 모두,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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