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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8 09:53 수정 : 2013.08.13 10:10

이영훈 소설 <9화>



궐의 처마가 눈에 들어왔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가느다란 은색의 줄이 묘한 모양으로 겹쳐 걸려 집을 이루고 있었다. 새벽 거미가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흠칫, 줄이 흔들렸다. 빛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갔다.

거미줄 한쪽에 나비가 걸려 있었다. 추국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내 거미줄에 묶여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경의 목소리에는 잔뜩 울음이 섞여 있었다. 애초부터 저는 그런 운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놈, 애초부터 그런 운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다 제 놈이 스스로 재촉한 운명 아니던가. 덕분에 덩달아 나까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꼴이 됐다. 하기야, 내가 죽는 것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 말마따나, 우리는 모두 죽으니까. 하지만,

줄에 묶인 나비의 움직임이 멈췄다. 줄 끝에서 새까만 거미가 조심스레 기어 내려와 나비에게 다가갔다. 홀린 듯, 손을 뻗어 줄에 가져갔다.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거미집 끝에 걸렸다. 허공을 휘젓자 아무런 감촉 없이 거미줄이 손가락에 말려 나왔다. 나비와 거미가 바닥에 떨어졌다. 칭칭 줄에 묶인 나비는 움직이지 못했고, 거미는 열심히 나비를 찾아 부지런히 바닥을 헤맸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대체 왜 제대로 답하지 않았는가? 모두 알고 있었다면서. 알면서 왜 아는 대로 말하지 않았는가? 차라리 달아나면 좋았을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면, 미리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가 있으면 되잖았는가? 절대 너는 죽을 수 없었다. 알고 있었을 테니. 그런데도 왜 너는 다섯이 죽는다고 말했나.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는데도 너는 그리 말했다. 어차피 모두 죽는다면 왜 하필 죽는 일에 대해 말하나. 그 모든 게 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면, 그건, 너무 비참한 일 아닌가. 다가가는 순간 변하고, 말해도 소용없고, 손 한 번을 잘못 놀려 죽고. 이 형편없는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너는 다른 것을 말해야 했다. 이를테면, 차라리.

갑자기 머릿속이 비어, 나는 그저 손가락을 비볐다. 손에 걸려 있던 은색의 줄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처럼 감촉 없이 한데 뭉쳤다.

멍하니 어두침침한 궐 안을 바라봤다. 평평한 사방의 벽이 점점 좁혀 들어와 어딘가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답답해 숨을 깊이 들이쉬고,

아버님은 통나무처럼 죽었다. 병환은 아니었고, 기름이 다한 등불처럼 가물가물 기력이 쇠하며 몸과 마음이 잦아들었다. 정신이 희미할 때는 난데없이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렸고, 가족이나 집안 일꾼을 괜한 일로 괴롭혔다. 가장 곤란한 것은 아버님의 볼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의 아버님은 정해진 곳에 일을 보지 않았다. 방이나 마루에서 눕거나 앉아 일을 봤고, 그 처리는 가족의 몫이었다. 아버님이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거동을 못 하게 된 후로는 그나마 처리가 수월했다. 더러워진 이불 속을 치우기만 하면 됐으니까.

형조판서에 제수된 날, 집에 돌아와 보니 해는 이미 한참 저물어 있었다. 왕과 그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다니다 어느새 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아버님에게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여겼다.

가는 호롱불이 켜진 어두운 방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깊이 절을 한 후, 몸을 들었다. 아버님이 누운 자리에는 들큼한 악취가 배어 있었다. 쌕쌕, 아버님의 숨소리를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버님은 잠들어 있었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형판이 되었습니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비슷한 때가 있었다. 아버님의 부름을 받고 늦은 시각 찾아뵌 밤. 나는 십몇 년 만에 소경을 기억해냈다. 형조판서가 될 거라던, 그 눈먼 놈.

“소경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다시 절을 하고,

“정말로 형판이 되었습니다.”

일어서 나가려 했을 때,

“상감께서 베푸신 것이냐?”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아버님이 물었다. 잠을 깬 모양이었다. 황급히 다시 무릎을 꿇었다.

“정말로 형판이 되었단 말이냐?”

재차 아버님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제수되었습니다.”

오호, 탄식처럼 아버님이 숨을 토했다. 고개를 들어 아버님을 바라봤다. 잔뜩 말라붙어 쪼글쪼글해진 아버님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참, 잘됐다.”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가 이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벼슬자리는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것참, 잘됐다.”

아버님은 어린애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아버님의 눈동자엔 총기라곤 없었다.

“쓸 것을 가져오너라.”

아버님이 이불 속에서 뒤척거렸다.

“내 상감께 감사드리는 서신을 올려야겠다.”

어찌 일어나 보려 애를 써도 아버님의 몸은 뜻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님이 이불 속에서 꾸물거릴 때마다 오물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밤이 많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쉬시고, 서신은 내일 아침에 쓰시지요.”

아버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런 것은 도리가 아니야. 당장 서신을 써 올려야겠다.”

이불 속의 움직임이 조급해졌다.

“아버님, 밤이 늦었습니다.”

“밤이 무슨 상관이냐. 서신을 써야겠다.”

“아버님, 하지만,”

아버님을 진정시킬 만한 핑계를 생각했다. 하지만 변변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몹시 애원하며 아버님을 만류했지만 아버님은 막무가내였다. 아버님이 뒤척거리는 소리 이외에 밤은 조용했다.

“모두 잠들었습니다.”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아버님이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모두?”

멍한 얼굴로 아버님이 나를 돌아봤다. 말을 뱉은 나 역시 의외였지만 아버님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움직인 것은 다행이었다. 아버님이 텅 빈 눈을 깜박거렸다.

“모두 자고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모두 잠들었습니다.”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아버님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도 잠들었느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아버님이 다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모두 잠들어 조용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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