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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12 10:11 수정 : 2013.08.13 10:10

윤고은 소설 <다옥정 7번지> ⓒ전지은



이야기의 끝은 공교롭게도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밤을 목격한 사람이 어디 없을까요. 밤눈이 밝거나 시간이 남거나 관심이 많거나 해서 어두운 거리를 훑어본 사람, 그러다 나를 본 사람 말이에요. 당신이 그 거리 위를 지나올 때, 분명 1930년대 풍경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걸 말해줄 수 있는 사람, 그건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었다고 증언해줄 사람, 어디 없나요. 거리를 걷기 시작했을 때는 1930년대였던 것이 그 끝에 가서는 2010년대로 변해버렸으니 하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산책일 뿐이었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막 마친 참이었거든요. 초고를 완성한 후에는 약간의 탈출 욕구를 느끼곤 했고, 그럴 때는 무작정 걷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벗을 만나고 술 몇 잔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던 게 새벽 2시쯤. 밤이 깊었지만 여름밤의 천변은 산책을 좀 더 권유하는 것도 같았죠.

저만치 익숙한 대문이 보이기만 했다면 나는 그 대문으로부터 좀 더 멀어지는 방향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름밤의 산책은 포옹처럼 사람을 위로하는 데가 있거든요. 그런데 선뜻 대문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겁니다. 한참을 빙글빙글 돌아봐도 내가 알던 그 골목에는 내 집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어서 주변을 돌아봤는데, 집이 없어졌다기보다는 골목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도무지 익숙한 문패가 없었어요. 누군가 관찰자가 있었다면,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한 사내를 봤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이젠 집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으로 가기 위한 걸음이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모든 것이 더 낯설어지는 것 같았죠. 집이 아니면 약국이라도 찾아가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약국 말이에요. 그렇지만 아버지의 약국이 아닌 다른 어떤 약국이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진정으로 약이 필요했어요. 대로변으로 나가보기도 했지만, 정말 나는 자그마한 골목들과 자그마한 약국과 자그마한 문패가 필요했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적어도 내가 상상하는 형태로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동이 터 오고서야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아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하고.

그 밤으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고, 내가 이해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사라진 건 집이나 약국, 골목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라고. 여기 제 살던 시대를 통째 도둑맞은 사내가 있다고. 그렇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누구의 식민지도 아니고 모던보이도 없는 그런 시대로 떨어져버린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시대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저 그 시대로부터 내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게 더 간편한 것도 같군요. 그 시대에서 나만 증발해버리면,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무탈하지 않습니까.

광화문 네거리에서 커다란 문장 하나와 운명처럼 마주쳤던 게 그 이튿날인가요, 사흘째 되던 날인가요. 며칠 동안 서울 시내를 걷고 또 걷느라 내 발이 해질 지경이었는데, 그 순간 눈앞에 그 문장이 나타난 겁니다.

‘어느 틈엔가 그 여자와 축복받은 젊은이는 이 안에서 사라지고, 밤은 완전히 다료 안팎에 왔다.’

문장이 적힌 천막은 내 방보다도 더 넓어 보였습니다. 천막은 아주 거대한 건물의 벽면에 네 귀퉁이를 적절하게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글씨체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내가 쓴 문장인 것 같았습니다. 추측의 형태를 취한 건 아직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초고의 한 구절이 저 벽에 걸려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건 부인할 수 없는 내 문장이었습니다. 초고에서 맨 마지막으로 건드렸던 문장이기에 유독 기억에 남았던 겁니다. 텔레파시나 표절이 아닌 이상 저 문장이 거리에 공개 처형당하듯이 걸려 있을 리가 있나요. 그렇지만 누가 내 글을 훔친단 말입니까.

현수막이 누구 것인지를 알고 싶어서 건물 입구에 가 물어보니, 교보문고에 문의하라더군요. 그 건물 지하에는 거대한 서점이 있었어요. 나는 거기서 그 문장이 내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에요.”

서점 직원은 능숙하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받아 들고 앉은 자리에서 읽고 또 읽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낯설어져서 마침내는 내가 쓴 것이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아주 생소해졌죠.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서 횡단보도를 두 개나 건너면, 대각선 방향으로 그 문장이 국기처럼 펄럭였습니다. 그걸 한참 쳐다보는 동안 두 가지 감정이 몰려오더군요. 하나는 아, 내 소설이 후대에도 읽히고 있구나, 하는 전율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 내가 왜 이 상황에 놓여야 하는가, 하는 당혹감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도망치듯 어떤 골목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때는 골목만이, 아주 좁은 골목만이 나를 이해해줄 것 같았습니다. 막다른 골목 말고 어디로든 좁고 가느다랗게 연결될 수 있는 그런 골목이면 충분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건물, 교보타워의 주소가 종로 1번지더군요. 그 앞으로는 자주 지나가곤 했습니다. 복원된 광화문과 솟아오르는 분수들, 카메라 든 외국인들, 짧은 스커트 입은 여인들 틈에서 길을 잃어도 저기 걸려 있는 내 문장이 나를 위로했으니까요.




윤고은(소설가)




윤고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산대학문학상, 한겨레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다. 장편소설《무중력증후군》과 소설집《1인용 식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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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윤고은의 <다옥정 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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