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 소설 <5화>
구보는 종로 네거리, 화신상회 앞에서 동대문행 전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동대문에서 다시 한강교행 전차로 갈아타고 조선은행, 바로 지금의 한국은행 앞까지 왔죠. 책으로 네 페이지쯤 흘러가는 구보의 전차 경로는 지금 그대로 재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사라진 것도 많고 생겨난 것도 많으니까요. 물론 모든 풍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은행이었던, 지금의 한국은행 건물은 과묵한 증인처럼 계속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죠. 나는 어떤 ‘사무’를 가진 채로 그 건물 앞을 맴돌 때마다 혹시 저 은행 건물은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해보곤 했습니다. 1930년대에 이 앞으로 지나가던, 단장과 대학노트를 든 한 사람을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 앞 ‘포토존’ 푯말 아래서 줄줄이 비엔나들과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만.
이 포토존은 각도를 세심하게 고려해서 만들어진 건 아닌 듯했습니다. 여기선 평면적인 사각 틀이 아니라 몸을 돌려가며 파노라마식으로 주변을 감상해야만 제대로 된 풍경이 나오거든요. 한국은행 건물을 등지고 서면, 왼쪽으로 중앙우체국 건물이 마치 양 갈래로 찢어질 듯 서 있고, 맞은편에는 신세계백화점 본관이 있습니다. 옛 이름은 미쓰코시 백화점. 백화점 건물 안에는 내부의 중앙계단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에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 보기를 원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획기적이었던 건축물이 지금 이 사람들에게는 고풍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며칠이 정말 며칠이 아니니까 그렇겠지만, 어쩐지 그 며칠 새 나도 몇 십 년을 늙어버린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습니다.
구보 따라잡기는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다옥정 7번지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여기서 찍어내는 것도 많아졌습니다.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 동선이 나타난 컬러판 지도는 물론이고, 구보의 캐릭터 인형이나 그 동그란 안경 같은 것도 생겨났죠. 구보의 산책길을 어떤 속도로 따라 걸으면 얼마의 열량이 소비되는지에 대한 정보도 있었어요. 이곳에 고용된 대부분의 박태원들은 구보 씨의 일일을 재현하는 데서 어떤 사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습니다. 속내를 교환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그중에 나보다 두 살 어린 남자와는 종종 비상구에서 담배를 함께 피웠습니다. 그는 박태원으로 박사논문을 썼다고 하더군요. 단지 그 학위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의 기세에 눌려 나는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죽었답니까?”
“박태원이요?”
그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월북한 후 어쩌고저쩌고.
“월북이요?”
아주 추상적이고 모호한 답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전혀 그렇지 않은 답을 듣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어느 순간 증발했다거나 실종되었다거나 그런 답 말입니다. 그렇지만 박사가 알려준 그 답은, 어쩐지 나 말고 진짜 늙어서 자연사한 박태원이 있을 것만 같아 이상했어요.
“박태원 외손자가 봉준호인 건 아시죠?”
봉준호가 누구냐고 물으려다가 나는 얼버무리듯이 대답을 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몰랐는데요, 기억이 가물거리네요, 잠깐 까먹었어요, 하는 식으로. 그러자 그 박사가 나를 툭 치면서 힌트를 주더군요.
“괴물 말이에요. 괴물.”
“괴물이요?”
“안 보셨어요?”
“글쎄요.”
상황을 보아하니 봉준호는 영화를 만드는 것 같더군요. 박사는 구보학회에서 하는 행사에도 꾸준히 출석하면서 박태원에 대해 이런저런 방면으로 연구를 한 것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빠삭했지요. 그런데 왜 여기 서 있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겁니까? 그나저나 외손자라니, 결혼은 한 모양이로군요. 내가 말입니다. 하긴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는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거리’였던 건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인물 구보였죠. 그렇지만 나라고 거기서 자유로울 순 없었습니다. 외손자라니, 뜬금없이 안도하고 있는 내게 박사가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거 시한부 프로그램인 거 아시죠?”
“그랬던가요.”
“세 달짜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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