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 소설 <6화>
그랬던 것 같았어요. 처음에 그런 설명을 들었던 것 같았죠. 박사는 말하더군요. 구보 따라잡기가 계속 갈 거다 아니다 말들이 많던데, 그래서 여기 일하는 사람들이 이걸 경력 삼아 할 다른 일거리들도 찾아보고 있다고요. 그중에 영화 면접도 있는 거고 말이죠. 그나저나 또 무슨 면접?
“영화를 찍을 거라는데요, 몇 장면에 구보 역할로 들어갈 사람이 필요하다는데 배우 아닌 일반인 중에서 뽑을 거라고요. 다들 난리예요. 찍겠다고요. 뭐 봉준호 감독이 직접 면접을 볼 거란 얘기도 있고.”
나보고 내 외손자한테 면접을 보라고? 나는 몸서리를 쳤습니다. 박사도 그 면접을 보러 가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다만 이 구보 따라잡기가 반응이 좋아서, 새로운 다른 것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으니,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나저나 이 다옥정 7번지에서 박태원으로 머무는 걸 언젠가는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습니다.
“낙랑파라는 1931년에 문을 연, 한국인이 경영한 최초의 카페였습니다. 낙랑파라가 위치했던 곳은 지금의 소공동이었는데, 1930년대 지식인, 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어요. 구보 박태원도 김기림, 이상 등과 더불어 낙랑파라에 자주 드나들었고, 이곳에서는 자주 전시회나 문학의 밤이 열렸다고 하지요. 소설 속의 구보도 낙랑파라에서 벗을 만납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다고 누군가가 중간에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에 내 목소리는 더 커졌고, 이상하게 목소리는 커졌는데 스스로는 더 중얼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중얼거렸습니다. 말하다보니 낙랑파라가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정말 프라자호텔 뒤 한화건물 쪽으로 걸어가면 낙랑파라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거기엔 지금은 사라진 낙랑파라를 포위라도 하듯 동그랗게 대형 커피 체인점들이 들어서 있었어요. 카페베네, 커핀그루나루, 탐앤탐스, 스타벅스……. 다른 거리에도 같은 간판, 같은 테이블과 의자로 무수히 복제되어 있는 그 이름들 중에 진짜 낙랑파라는 없었습니다. 영혼 없는 설명이랄까요, 내 목소리가 내게도 다른 사람의 말소리처럼 막연하게 들렸습니다. 내가 점점 이 구보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이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되는 것 같았어요. 이 도시는 끊임없이 공사 중인 것 같더군요. 이 끝에서 시작해서 저 끝까지 한 줄 공사를 끝마치면, 다시 이 끝으로 돌아와서 가장 덜 새로운 공간들을 또 하나씩 건드리기 시작하는 거죠. 마치, 새롭지 않으면 멈춰 있는 거며, 멈춰 있으면 뒤떨어지는 것처럼, 조급증에 걸린 사람들처럼요. 늘 새롭기 위해 애쓰지만, 이상하게도 그 새로움은 또 획일적이어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요. 결국 이제는 낡은 것이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달까요. 나는 나를 따르는 비엔나소시지들을 내버려두고, 갑자기 대학노트를 꺼내 메모를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소설가가 작품에 실제 배경을 등장시키는 것은 증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사라질 것에 대한 박제의 욕구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침묵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대사를 읊었습니다.
“월북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묶여 있었던 이 소설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1988년의 일입니다. 소설이 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되었을 때, 그 안에는 이미 낯설어진, 소모된 지명과 건물들이 박제되어 있었을 겁니다.”
동그란 서울광장 주변으로는 동그랗게 말린 건물들이 많아서 이 거리를 통과하려면 치밀한 동선의 계산이 필요했어요. 횡단보도가 잘 보이지 않는 이 거리에서는 자주 무단횡단의 욕구를 느끼지만 오가는 차들도 적지 않거든요. 지하도를 이용해야만 하는,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생각 없이 산책하다가는 미로에 갇힐 것 같은 그런 거리. 그러니까 산책하기보다는 한 군데에 점처럼 박혀 서 있거나, 지하도의 출구를 잘 가늠해보아야 하는 거리. 생각 없는 산책으로는 미로에 갇힐 수밖에 없는 그런 거리. 요즘 매일 걸었던 거리긴 하지만, 갑자기 낯설어 보이는 거리. 나는 거기 서서 예정에 없던 대사를 내뱉었죠.
“여러분, 구보가 지금 이 구조의 거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누군가가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움직이는 전차에 뛰어오르지 않았을까요,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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