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8.21 09:58 수정 : 2013.08.22 10:24

윤고은 소설 <7화>



퇴근 후에도 종종 나는 산책을 하곤 했습니다. 이제는 광화문 네거리의 현수막이나 복원된 광화문 같은 걸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되는 대로 걸었던 거지만 동선은 자주 소설 속 구보와 겹치더군요. 이상하게 낮에 갔던 길을 피해서 걷고 걸어도 또 그 구보의 산책 코스 안으로 편입되어버리곤 했습니다. 그건 좀 달갑지 않은 일이었죠. 나는 어느새 새 산책로를, 누구에게도 따라잡히지 않을 산책로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구보가 전차를 타고 위에서 다림질하듯 지나쳤던 길을, 이제 나는 밑에서 지지하듯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지하철 안에서 복숭아가 와르르 굴러가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복숭아를 한바탕 바닥에 흘리고는 바로 그 복숭아 몇 알 줍기를 포기해버렸는데, 그 여자가 결국 복숭아를 줍도록 만든 건 휴대폰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복숭아를 주우라고 말했고, 여자가 대꾸하지 않자, 다른 누군가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그 상황을 찍으려고 한 겁니다. 그 전자기기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여자는 무릎을 구부리고 떨어진 복숭아를 줍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역에서 휙 내려버렸죠.

그걸 보면서 떠올린 건 내 처지였습니다. 나 역시 그 1930년대의 비닐봉지에서 추락해버렸는데, 누구도 줍지 않아 그 시대의 페이지에서 떨어져 나간 것 아닐까요. 역사 속에 기록된 박태원은 그 1930년대의 비닐봉지 안에 그대로 있고, 나는 역사와 역사 페이지 속에 교묘하게 떨어져 버린 거 아니냐 그 말입니다. 내가 속한 페이지는 전체 책장에서 파본 취급을 받는 걸지도 모릅니다.

역사 속에서 굴러떨어진 복숭아 한 알을, 그러니까 나를, 누구 본 사람 없나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이 들리면 더 이상하겠죠.

관리과장에게서 ‘당신이 박태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은 날, 나는 비슷한 말을 들었던 박사와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시한부의 끝은 곧 다가올 것 같은데, 박태원의 정원을 줄인다는 말도 있던데, 아무래도 나는 그 안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더군요. 박사가 나랑 비슷한 기분인 것 같았습니다. 인생 경험 삼아 이 일을 시작했다더니, 그는 나보다 더 절실해 보였어요.

곰장어가 맛있더군요. 공평동 곰장어집은 시끌벅적했지만 외롭지 않아 좋았습니다. 박사는 이런 얘기를 꺼냈습니다. 자신의 집이 아주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요. 박사의 집은 빌라 2층이었는데 그 빌라 전체가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거였죠. 박사는 붉은색 페인트로 약간의 표시를 해두기까지 했는데 집은 그 붉은색 페인트를 이미 밟고 왼쪽으로 지나간 지 오래라는 거예요.

“대륙 이동이라고 할 수도 없고 빌라 이동이라고 해야 하나요? 자고 일어날 때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다르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이 얘기를 했더니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건 자력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자력이라니. 난 더 설명이 필요해요, 형.”

그가 형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용기가 생겼습니다. 박사는 계속 떠들어대더군요. 어떤 언론도, 어떤 학회에서도 이런 유의 일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이죠. 나는 그럼 이런 유의 일은 어때, 하며 내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내가 진짜 박태원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시대로 툭 떨어진 것뿐이라고. 산책을 하던 중에 그렇게 길을 잃은 것뿐이라고. 이건 무슨 종류의 이동일까, 하고.

빌라 이동을 겪은 박사라면 내 상황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그는 너무 유연하게 대처하고 말았습니다.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형이 박태원이면 난 이상을 할게요.”

그러면서 볼펜을 집어 들더군요. 상 위의 냅킨에다가 묘한 그림을 그려대더니, 구보에게 선물하는 삽화라며 내 셔츠 주머니에다 그 냅킨을 접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박태원이 아닌 이유를 대보라고 했더니, 박사는 형이 박태원인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더군요.

“이름이 똑같다고? 에에.”

박사는 날이 밝는 대로 개명 신청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개명 이유는 새 구직 활동을 위해서.

“내가 장난이 아니고 진짜로 이름을 바꿀까요, 형? 이상으로 진짜 바꿀까. 하긴, 내 성이 이가잖아. 서촌 쪽에 이상의 집을 새로 꾸밀 거라던데 들었어요? 근무 시간이 여기보다 더 짧더라고요. 돈은 똑같고. 우리 같이 갈까요, 박태원 형?”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윤고은의 <다옥정 7번지>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