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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22 10:18 수정 : 2013.08.26 10:39

윤고은 소설 <8화>



나는 건너편에서 저만치 내 집터를 잘라먹고 서 있는 그 건물을 쳐다봤습니다. 그 건물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어서, 그 건물에 들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선권을 내세우고 싶었나 봅니다. 박사와 헤어진 후 나는 그 건물 앞을 일부러 지나쳤습니다. 한참 그 건물을 마치 내 집에 들어온 세입자인 것처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돌아섰습니다. 아마 저 관광공사 직원, 이름이 뭐라더라, 아, 명함에는 ‘이미숙’이라고 적혀 있군요. 그 이미숙 씨를 잠시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때, 참 희한하게도 저만치서 나타난 이미숙 씨가 나를 알아보더군요. 이미숙 씨는 퇴근이 늦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 덕분에 집을 찾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당신 덕분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는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물론 시한부 일자리이긴 하지만. 나는 다음에 내가 차 한잔을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미숙 씨가 그러라고 하더군요.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현재 내가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지인이었습니다. 이미숙 씨는 내게 친절하기도 했죠. 나에 대한 부채의식도 있는 것 같고, 고충에 대한 사후관리도 열심히 하니까요.

나는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어보았습니다. 아니면 지금은 어떠세요? 그냥 떠본 말인데 어쩐 일인지 이미숙 씨가 좋다고 하네요. 우리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미쓰코시 옥상으로 갈까요? 내가 말하자 이미숙 씨가 웃으면서 묻더군요.

“일본인인가요?”

그게 유쾌한 대답이라는 걸, 나는 알았습니다. 백화점은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모든 건 다 근처의 일이었으니까요. 건물 6층으로 올라가면 옥상 정원이 나옵니다. 그래요, 바로 여기서 내 벗 하나는 날자 날자 날자꾸나, 하고 외쳤습니다. 평소에도 자주 그런 말을 하곤 했는데, 얼마 전에 그의 책을 사 보니 소설에도 썼더군요. 구보가 전차를 타고, 혹은 걸어서 저 아래를 산책하는 동안, 내 벗은〈날개〉의 주인공을 이 백화점 옥상으로 밀어붙인 셈이죠. 그나저나 그 벗과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했군요. 늘 하던 밤의 약속이긴 했습니다만.

지금 옥상 정원에는 디저트로 유명한 카페가 들어섰고, 각종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미 조각상〈마망〉한 점도 이곳에 여덟 개 다리를 분수처럼 펼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지요.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면서 조용히 여름밤을 즐기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가렵지 않아요. 가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날개가 돋아날 위험도 없지요. 다만, 맞은편에 보이시나요? 중앙우체국 건물 말이에요. 그 우체국만이 온몸으로 가려움을 느끼는 듯, 양 날개를 쫙 펼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 같이’ 느꼈습니다.

밤바람 사이로, 음악 사이로, 옆자리의 여인이 그 앞에 앉은 청년에게 건네는 말이 들렸습니다. 경리단 길을 갈까, 가로수 길을 갈까.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도 이미숙 씨와 어디로든 가고 싶은데, 그게 어디인지를 모르겠다고요. 나는 이미숙 씨가 내일 뭐 하느냐고 물으면 뭘 한다고 대답할까 헤아려봤습니다. 내일도 또 같은 하루가 오겠지요. 그럼 나는 오늘처럼 다시 낙랑파라로 돌아가 벗을 만나고, 대창옥은 아니지만 나를 따르는 일본인 관광객들과 함께 설렁탕집에 가서 한 그릇씩을 시킬 겁니다. 그리고 또 종로 네거리를 거쳐 다시 광교로 갈 겁니다. 이번에는 광교를 지나 다옥정 7번지로 돌아가는, 소설 속 동선에 맞는 걸음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사이 어디쯤에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생활을 가지리라. 내게는 한 개의 생활을, 어머니에게는 편안한 잠을, 평안히 가 주무시오. 벗이 또 한 번 말했다. 구보는 비로소 그를 돌아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떡하였다. 내일 밤에 또 만납시다. 그러나,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내일, 내일부터, 내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그러나 이미숙 씨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내일의 내 하루에 대해 누구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방 안에서 뭔 자료들을 그렇게 꺼내주는지, 두툼한 문서들을 내게 전해주더군요. 그 안에는 현진건과 이효석과 정지용과 김기림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았던 건 ‘이상 따라잡기’였어요.

“이상도 괜찮지 않아요? 브랜드로.”

이건 아주 야심 찬 프로젝트라고 하더군요. 나는 이상 따라잡기의 브로슈어를 대충 훑어봤습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상도 이 얼굴은 아니었거든요. 지금 실려 있는 건 누구의 얼굴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숙 씨와 헤어지고서야 나는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아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그건 광화문 네거리에 걸려 있던 그 문장 속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틈엔가 그 여자와 축복받은 젊은이는 이 안에서 사라지고, 밤은 완전히 다료 안팎에 왔다.’

어쩌면 저 문장 하나 때문에 나는 이런 시간의 단층을 겪은 건지도 모릅니다만, 결국에는 또 그 문장 속 축복받은 젊은이는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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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윤고은의 <다옥정 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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